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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8. 2022

산타 할아버지의 환상, 그 마지노선을 위하여

나의 최선은 최악이었다.

22. 12. 7. 진작에 정체를 눈치 챈 걸까?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애들한테 무슨 선물을 해야 하지?"

"글쎄. 마땅히 할 만한 게 없어."

"잘 좀 생각해 봐. 애들이 평소에 갖고 싶어 했던 게 뭐였는지."

"별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올해가 진짜 마지막이야. 마지노선이라고. 더는 안 속을 거야."

9살, 11살, 이미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꿍꿍이를 진작에 눈치챘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가느다란 희망 한 가닥을 붙잡고 올해까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우리는 뻔뻔스럽게 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거짓말 조금 많이 보태서) 1년 동안 고민을 해 왔지만 내일모레 운명의 날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 같은 건 더 이상 세상에 없다고, 엄마 아빠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추궁을 해대기 시작한 건, 아마도 거의 확신에 차서 제 부모를 의심한 건, 작년 크리스마스 때였을 것이다.

"엄마, 저기 누나 방에 무슨 선물 상자 같은 게 있던데 그거 뭐야?"

"선물은 무슨 선물? 뭐가 있다고 그래? 빨리 씻기나 해!"

"누나~ 빨리 와봐. 여기 무슨 선물이 있어."

"어디 어디?"

"얘들아, 얼른얼른 씻어라,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화들짝 놀라 나는 아들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제 방으로 가서 증거를 확보하려는 딸을 온몸으로 제지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씻는 동안에 문제의 그것을 아들 방으로 옮겼다.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하필이면 아들이 뭔가를 찾다가 또 그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허술하게도 나는 급한 대로 담요로 그것을 대충 덮어 두었던 것이다.

보물 찾기도 아니고 아들은 무슨 재주가 그리도 뛰어났던고?


"어? 엄마 이게 뭐야? 아까 누나 방에 있던 거 같은데, 왜 여기 있지?"

"얘가 무슨 소리야? 도대체 뭘 보고 그런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네가 잘못 본거 아니야?"

2차 증거를 포착한 아들은 끈질겼다.

"아니야. 내가 분명히 누나 방에서 봤어. 저기 선반 꼭대기에 있었던 거랑 같은 건데?"

"그런 게 어딨어? 엄마는 사지도 않았는데."

증거를 인멸하려다가 오히려 나의 허술함을 실토함과 동시에 더욱 강력히 의심받을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어? 엄마가 사 둔 거지? 그게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왜 그래? 얼른 머리나 말려!"

아이들은 저희가 헛것을 보지 않았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댔고 나는 나대로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계속 잡아떼기에 바빴다.


남매가 저희들끼리 노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그 '원흉'을 담요째 싸 들고서 증거 인멸의 최후의 보루, 차로 가져가 트렁크에 숨겼다.

나는 생필품이라 주장하고 남편은 굳이 그런 걸 뭐 하러 샀냐며 핀잔을 줄 때면 일단 받은 택배를 트렁크로 은닉하던 못된 버릇이 내게 있었다.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못된 습성.

철없을 적 택배 은닉하던 버릇 마흔 넘어서도 쭉 잘도 간다.

멀쩡히 있는 것을 보았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아이들을 졸지에 헛것을 보는 아이들 취급을 하고 나는 마지막까지 뻔뻔하게 굴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불과 크리스마스를 며칠 안 남기고서 일어났던 일이다.


"엄마, 근데 아까 그거 뭐였어? 엄마가 사 둔 거 맞지?"

"아니라니까. 엄마가 샀으면 샀다고 말하지 뭐가 무서워서 너희한테 거짓말을 하겠어?(=그동안 엄마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였다는 걸 순진하게도 아이들이 계속 믿고 있었을 거라는 그 착각을 한동안 더 착각하고 싶어 하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어미를 용서하거라.)"

"이상하다? 분명히 뭐가 있었는데. 엄마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까 분명히 내가 봤단 말이야. 누나, 누나도 봤지?"

"응. 엄마. 나도 봤어. 분명히 내 방에 있었어. 겉에 상자가 노란색 바탕이었고, 검은색 줄무늬가 두세 줄 있었고 약간 가방처럼 생겼었는데. 크기는 내 가방보다도 좀 작았어."

이럴 수가.

한 번 본 것은 귀신같이 잘 기억해 내는 딸이 정확히 인지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의 말은 정확했다.

하마터면

"대단하다. 한번 잠깐 보고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

라고 맞장구치며 딸의 눈썰미를 한껏 칭찬해 줄 뻔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거짓말을 했으니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갈 의무가 있었다.

"얘들아. 생각을 해 봐. 엄마가 너희들 주려고 뭘 샀으면 당당히 주지, 뭐 하러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그러겠어.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아들이 살짝 수긍하려고 했다.

"엄마, 혹시 크리스마스 선물 사놓고 우리한테 비밀로 한 거 아니야?"

예리한 딸은 과연 동생보다 2년이나 더 속세에 물든 보람이 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 그래? 아무튼 집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젠 신경 쓰지 마."

집에는 없지.

진작에 차 트렁크에 숨겨 뒀으니까.

하지만 남매는 포기를 모르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올 턱이 없지.

진작에 내가 빼돌렸으니까.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봤는데. 어디 갔지? 누나, 누나도 잘 찾아봐."

"알았어. 나도 분명히 봤어. 아까 내 방에 있는 거 다 봤어."

그렇게 그걸 찾고 싶으면 내가 힌트 좀 주랴? 하고 싶을 만큼 아이들을 열성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완전범죄(라고 나만 착각한)를 저지른 나는 이제 여유가 있었다.

'백날 뒤져봐라. 절대 못 찾을걸?'

소풍날 보물 찾기를 한다 한들 그렇게 열심이었을까.

애가 닳아 발까지 동동 구르며 저희끼리 속닥속닥 뭐라고 주고받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간 깔끔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뻔뻔함을 끝까지 고수했던 내가 다 대견했다.


헛수고만 하는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며칠만 더 잘 버티면 완벽하다고 혼자서 계속 착각을 했다.

멀쩡한 있는 것을 없다고 잡아떼는 것, 분명 진실이었으나 거짓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 그거 아주 순식간의 일이다.

일찌감치 남매를 단념시켜야 했다.

"얘들아. 너희가 잘 못 본 거 맞다니까. 엄마는 아무것도 못 봤는데 너희는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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