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봐. 엄마. 이거 그거 맞잖아. 내가 그때 누나 방에서 본 거. 누나 봐봐. 맞지?"
"어? 진짜네. 맞아. 이렇게 생겼었어."
"아니 이 애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엄마는 모르는 일인데."
"에이 엄마, 괜찮아, 사실대로 다 말해도 돼."
"그래. 사실은 엄마가 우리 주려고 선물 사놓고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것처럼 한 거지? 그치? 솔직하게 말해 봐."
"아니라니까 진짜 너희들 왜 그래?"
"아닌데. 분명히 이건 엄마가 산 거야. 그때 내가 본 거랑 똑같아. 그치 누나?"
"내 말이 맞잖아. 노란색 바탕이고 가방 모양에 검정 줄이 두세 개 있고. 딱 그때 그거네 뭐."
"엄만 모르겠다. 그나저나 너흰 좋겠지. 산타 할아버지가 이런 선물도 다 주고."
이미 들통났다 싶었지만, 아무리 내가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둘러대고 변명을 해도 아이들 앞에서 틈을 많이 보였던 엄마를 그들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사람이, 한번 신뢰를 잃으면 이렇게나 무서운 거로구나.
뒷감당이 안된다.
이미 크리스마스 아침은 밝았고 나는 (무척이나 허술했지만, 그 어이없는 실수에 남편에게까지 지청구를 잔뜩 들었지만) 할 일을 무사히(전혀 무사히도 아닌데, 우여곡절 끝에) 마쳤다는 생각에 반은 뿌듯했고, 반은 찜찜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고. 어떻게 했길래 애들이 다 눈치챈 거야?"
그 양반이 또 나섰다.
"평소엔 제 누나 방에 잘 들어가지도 않더니 하필이면 그날 바로 들어갈 게 뭐야."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 애들이 진작에 눈치챈 거 같던데?"
"몰라.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뭐 하러 자꾸 말해?"
가뜩이나 임무 완수보다는 실패에 가까웠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뼈저리게 반성하며 다음에는 좀 더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파격적이기까지 한 전략으로 갈아타야겠다고 굳게 다짐한 후였는데, 그렇잖아도 나도 속상했는데 한겨울이라 내가 추울까 봐 옆에서 기름을 잔뜩 들이부어 활활 불을 지펴 주신다.
당신이란 사람, 참 따뜻하기도 하지.
아이들은 제 엄마의 노력이 눈물겨워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도(엄마의 소행이란 것을 이미 다 안다는 눈빛으로) 자기들끼리(종종 제 아빠와 합세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엄마가 얼마나 허술한 사람인지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안 속겠네. 내년엔 어떻게 해야 한담?'
본격적인 맹추위가 닥치기도 전에 겨우내 이를 어찌 감당해 낼까 하며 지레 걱정하는, 걱정도 팔자인 사람처럼 작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나는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도 생각 좀 미리 해 봐. 미리미리 준비를 안 하니까 이렇게 됐잖아. 내년엔 어떻게든 안 들키고 넘어가야 할 거 아냐?"
"왜 나보고 괜히 그래?"
"미리미리 애들한테 수요 조사 좀 해 놓고. 은근슬쩍 알아 두란 말이야. 뭘 갖고 싶어 하는지."
"알았어."
하지만 바쁜 그 양반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으며, 언제 관심이나있었던가?
올해도 나 혼자만 끙끙 앓고 있다.
"얘들아, 엄마 말 좀 잘 들어라. 그래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시지."
"에이~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어디 있어? 그동안 엄마 아빠가 우리한테 선물 줬던 거 아니야?"
딸은 이제 확실히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깨달은듯하다.
"누나, 그래도 모르지. 진짜 산타 할아버지가 있을지도. 엄마 말 잘 들으면 진짜 내가 갖고 싶은 걸 줄지도 몰라."
아들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들을 상대로라도 영업(올해가 아마도 마지막이 될)을 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기쁨도 행복도 더 배로 늘어나지만 더 이상 산타 할아버지를 믿지 않고, 믿기는커녕 오히려 의심하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은 어린이가 아닌 것 같은 서글픔에도 빠진다.
그리고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도 선물을 안 주시지만 거짓말하는 어른에게는 그 과보를 톡톡히 받게 하신다는 걸 알았다.
"나는 6학년 때까지도 산타 할아버지 믿었었는데. 요즘 애들은 너무 일찍 실체를 알아버리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러게. 나도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진짜로 믿었었어."
평소와는 다르게, 보기 드물게 남편과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우리는 회상에 잠겼다.
그 옛날 어렸던 날, 환상이 있고, 기대가 있고 설렘이 있었던 까마득한 그와 나의 어린 시절이 이제는 내 두 아이에게 어떤 것으로 다가올지, 아직은 그 순수함을 더 지켜주고 싶은 욕심에 엄마는 욕심을 자꾸 부리게 된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욕심을 부리는 어리석은 중생이여.
그나저나, 올해는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하나?
정말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건 아닐까 하고 착각하도록, 엄마 아빠가 아니라 아이들만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그분이 잠깐이나마 기쁨을 전해줄 수만 있다면, 찾아가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