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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4. 2022

'부모 사기단'의 탄생, 급조된 TF팀

부모 사기단 : 부모가 자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단합함의 준말

22. 12. 3. 어떤 팀

<사진 임자= 글임자 >


"오늘 애들이랑 어제 그 축구 보는 거 어때? 결과는 모른 척하고."


내 말 한마디에 남편은 TV를 당장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다.

일 년에 한두 번이나 켤까 말까 한 TV이다.

하도 사용을 하지 않아서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당장 보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아직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고, 고작 토요일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엄마, 이번 주는 어디 나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편하게 휴식이나 취합시다."

딸이 제안했다.

"그래, 그럽시다!"

원 플러스 원 아들도 가세했다.

"그러자. 엄마도 어제 김장하고 피곤하니까 책이나 보고 쉬어야겠다. 그럼 오늘 다들 집에서 얌전히 쉬는 거다!"

나와 딸은 수요일 사건으로, 남편도 주 초에 있었던 면접으로 피곤한 한 주를 보냈으니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위의 주말로 단합된 가족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날밤 축구가 생각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뒤적이다가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게 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이들이 축구를 보고 싶어 했으나 너무 한밤중에 하는 경기였으므로, 아이들은 둘째치고 내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TV 시청은 꿈도 안 꿨었다.

그런데 기쁘게도 이겼다니 이미 지난 경기이긴 하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방송이라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이 갑자기 든 것이다.

나 혼자 힘으로는 안된다.

옆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TV도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정도는 켜 줘야 TV가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 물건은 너무 소외되어 왔다.

바야흐로 소외된 물건들에 눈을 돌려야 할 계절이다.


"어제 끝까지 봤어?"

"거의 다 보긴 했는데 후반전 30분 넘게까지 보다가 잠들었어."

"그럼, 애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오늘 축구나 보자."

그리하여 (보기 드물게) 오래간만에 뜻이 맞은 남편과 나는  TF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그 실체를 알게 되면 사기를 쳤다고 항의할 것이 뻔했지만 일단은  뻔뻔하게 밀고 나가 임무를 완수하기로 했다.

대개의 TF 팀의 운명이 그러하듯 어디까지나 축구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만이다.


아이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들보다는 딸이 더 좋아한다.

"얘들아, 어제 축구했는데 엄마도 못 봤고 아빠도 보다가 잠들어서 이겼는지 졌는지 모른대. 우리 같이 볼까?"

"그래? 좋아."

자녀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그렇다고 너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식사 시간에 반드시 식탁에 앉아서 한자리에서 밥을 먹게 하는 편이지만 어제만큼은 느슨하게 해 주고 싶었다.

가끔의 예상치 못한 일탈은 자녀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게도 만드는 법이니까.


"오늘 아침은 그냥 상 펴고 바닥에서 축구 보면서 먹을까?"

"응. 엄마, 좋아!"

"와~ 신난다. 그럼 TV 보면서 밥 먹는 거야?"

첫새벽부터(7시를 첫새벽이라고 칭하기는 양심상 걸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계절이 겨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침 해도 늦게 뜨는 편이니까 그리고 새벽에서 벗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TV 시청을 한다는 일은 우리 가족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만큼 아이들은 환호했다.

게다가 '밥을 먹으면서'라니, 아이들은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싶은 표정들이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보는 부부는(대충 골이 언제쯤 들어갔고 몇 대 몇으로 이겼는지까지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집중하지 않았지만 남매는 카타르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아쉬운 순간에 선수들보다 더 온몸으로 아쉬워했고 첫 골이 나왔을 때는 층간 소음으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기쁨을 방출했다.

아침 주 메뉴인 조기구이를 먹으면서도 집었던 조기 살이 수 십 번도 더 무참히 바닥에 떨어졌다.

후반전이 5분도 남지 않게 되자 남매는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어떡해? 아빠, 곧 끝나는데 이러다가 그냥 끝나는 거 아니야?"

"그거야 모르지. 일단 끝까지 봐 보자."

남편 성격에 후반전까지 VIP 스포일러가 되지 않고 기밀 유지를 하느라 애를 쓰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내가 다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후반전에 골 넣었다고 하던데 언제 넣은 거야?"

"연장전에서 넣었어."

사이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안타깝게도 부부는 가까이에서 속삭여야만 했다.

후반전도 거의 끝나가려고 하자 남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다.

화장실을 간다, 물을 마신다 이탈자가 생겼다.

남편이 말한 골을 넣었다는 그 시간 즘에 무엇을 하려는지 남매가 자리를 떴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할 수는 없었다.

여태 잘 봤는데 도로아미타불은 아니 될 말이다.

남편은 인내심의 한계치에 달했는지 복선(인 듯 복선 아닌 직접적인 암시)을 깔았다.

"얘들아, 우리 끝까지 봐 보자. 마지막에 우리가 골을 넣을 수도 있잖아."


아이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이 터졌다.

"와아~ 아빠! 우리가 이겼어!"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생방송은 아니었지만 나도 가슴까지 뭉클해지는 것이 오랜만에 기분 좋은 느낌을 한껏 받았다.

그보다도 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을 국가 대표 선수들보다 어떻게든지 발설하고 싶어 참을 수 없는 비밀을 끝까지 잘 간직해 준 남편의 노력이 진심으로 가상하여 내 마음을 더 뭉클하게 만들었다.


단연코 그날의 승자는 남편이다.

한 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책임지고 지키는 그 사람(물론 항상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비밀 숨겨주기 대회가 있다면 한 번 참여해 보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중간중간 결과를 발설하려 했을 때 적절히 제지해 주며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나에게 무안을 주면서까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면서 핀잔주던 그 사람, 그의 참을성이 이 정도까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이왕 단합된 김에 나는 또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무슨 선물을 하지?"

"글쎄......"

"올해가 마지노선이 될 것 같아. 더 이상은 안 속을 거야."

"정말 그렇겠다."

축구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해체 위기에 처했던  TF 팀은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2차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활동 시기가 좀 이른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심판의 날은 닥치고 말리니.

내게 남편과 같이 하는 고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시고 나면 그 팀은 먼지처럼 흩어지게 될 예정이니까, 그래야 마땅하니까.


게다가,

임무를 완수하고도 팀을 해체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부모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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