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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29. 2022

9살이 문제 출제 위원이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진다.

22. 11. 28. D-1,고요한 밤, 중요한 밤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얘들아, 여기 보고 아빠한테 문제 한 번 내 봐."

"애들이 그걸 어떻게 해? 시킬 걸 시켜야지. 우선 이발부터 하고 나중에 공부해 차분히."

"얼른, 얘들아. 누가 할래?"

일요일 밤, 아이들은 서로 면접관이 되어 보겠다며 나섰다.

초2, 초4의 어린이들이 과연 해낼 수 있을 일이란 말인가?

그건 둘째치고 그런 걸 아이들에게 부탁할 거리가 되기나 하는 걸까.

한시가 급한데  뭔가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지역 교육지표라든지 중점 사항이라든지 교육 핵심 과제, 직장 내 갈등 해결 방안 등등 그냥 보기에도 아이들은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을 텐데,라고 나만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나 남매는 이게 무슨 수수께끼 놀이라도 되는 줄 알고 신이 났다.

그 누구보다도 초2 아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가장 소극적이었으면 하는 사람이, 아니 이 문제의 중심에서 제외됐으면 하는 사람이 아주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그렇잖아도 평소에 퀴즈 사랑이 대단하신 아들인데 말이다.

걸핏하면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내 등 뒤로 달려와 퀴즈를 내고 난센스 문제를 맞혀 보라고 하고 저 혼자 신나서 문제 내고 답을 맞히고 어쩌다 엄마가 틀린 답을 대면 어른이 그것도 모르냐며 고소해하고, 책을 읽고 있을 때조차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

"엄마는 지금 책이 중요해 내가 더 중요해?"

이러면서 금방이라도 엇나갈 것처럼 씩씩대곤 한다.

솔직히 책을 보는 순간만큼은 내게 책이 중요하다.

엄마에게도 책을 보고 공부할 최소한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들은 새겨듣지 않는다.


"자, 아빠, 잘 듣고 맞혀 봐."

"얼른 문제 내기나 해."

"여기에 번호가 4개가 있어. 이 중에서 세 번째에는 무엇이 쓰여있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잘 들어 봐. 여기의 숫자가 4개가 있다니까? 그러면 세 번째에는 글자가 뭐라고 쓰여 있냐고. 이게 문제야."

얼토당토않고 느닷없고 변별력 따위도 전혀 없으며 실제 시험에는 출제되지도 않을 법한 해괴망측한 방식으로 아들은 문제를 만들어 냈다.

그런 발상을 했다는 것부터가 대단했다.

옆에서 혀를 끌끌 차던 누나가 출동했다.

과연, 인생 2년 선배는 뭔가 달랐다.

뭐랄까, 조리도 있으면서 그럴듯하고, 어쩌면 문제로 나올 법도 싶은 그런 내용을 즉석에서 문제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어제도 남편은 저녁을 먹고 만학도의 고충을 굳이 아이들 앞에서 토로하며 한참 만담 시간을 가진 후에 도서관으로 하셨다.

"옛날에 나이 먹고 공부하기 힘들다더니 정말 그렇다. 얘들아, 아빠가 지금 일도 하고 공부까지 하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다."

"정말 그렇겠다. 아빠 요즘 공부한다고 매일 도서관 다니잖아."

"오늘은 10시 넘어서 올 것 같아. 그러니까 먼저 자고 있어."

"그렇게 늦게까지?"

"내일이 시험이잖아. 마지막까지 잘 준비해야지."

"아이고 아빠 그럼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도 원래 시험 일주일 전, 사흘 전, 하루 전날 이렇게가 가장 중요한 거야. 관리도 잘해야 하고."

남편은 다시 공시생 시절로 돌아간듯했다.

아니지, 그 옛날보다도 지금이 더 열심인 것도 같다.


"진짜 지금 이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게 쉽지 않네. 너희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나이 많이 먹고 공부하는 거 정말 쉬운 거 아니야. 그러고 보면 자기 계발한다고 직장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해. 그렇지 얘들아? 지금 너희들이 가장 좋을 때지. 너희가 무슨 걱정이 있겠냐. 먹고 놀고 자고 그게 다지. 아빠 어렸을 땐 말이야."

이러면서 '라테'를 급히 만들려고 한다.

주문하지도 않은 것을 본인의 추억에 심취한 결과이다.

해 떨어진 지가 언젠데,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에 마시는 라테는 숙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아빠, 그러니까 미리 준비를 했으면 됐잖아요."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못 내었던 속 시원한 소리를 딸이 대신해 주었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시켜서 한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 미리 준비했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어. 그런데 미리 준비한다고 꼭 더 잘할 수 있을까? 그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야. 아빠가 또 시험을 늦게 알아가지고 급히 하느라 더 시간도 없긴 한데, 이제 내일이면 다 끝나니까."

"날마다 공부할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고만 할 게 아니라, 적어도 토요일에 한 시간씩이나 걸리는 거리를 달려 당구 모임에 안 갔으면 그만큼 공부할 시간은 확보할 수 있었을 거야."

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남매는 아빠의 시험 같은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각자의 환경에 맞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 될 터였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남편의 셔츠를 다렸다.

"그래도 엄마가 아빠 셔츠도 다 다려주고."

"아빠, 옛날에도 엄마 일할 때도 엄마가 다 해 줬잖아?"

남편 말만 들으면 나는 내조라고는 뭔지도 모르는 세상 불량한 주부고 아이들에게 신경도 안 쓰고 사는 가장 편한 엄마고 하는 일 하나 없이 집안일이며 남편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다.

물론 항상은 아니지만 '대부분' 다림질은 내가 했었다.

그러나 '항상 하지는 않았다'라는 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남편은 결혼 십일 년 만에 처음으로 한 번 다림질하는 아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똑똑히 목격하고 진실을 결코 은폐하지 않는 여섯 개의 부릅뜬 눈이 우리 집에 있다.


오랜만의 다림질에 선이 자꾸 비뚤어졌다.

러다가 주름치마 저리 가라 하게 주름 셔츠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이 먹고 다림질하는 것도 여간 보통 일이 아니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통증이 오지만 아프다고 말했다가는 다른 여자들은 다 집에서 다려준다면서 다림질 같은 것은 '직장생활도 안 하는 아내'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남편에겐 집에서 그런 것도 안 하면 도대체 뭘 하느냐고 핀잔만 들을 게 뻔하므로 잠자코 있어야 하리.

걸핏하면 '일도 안 하는데' 이런 말은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알아서 다릴 의향이 있는데.

일을 그만둘 때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마는 당할 때마다 뜨악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른 건 무난한 것 같은데 내게 하는 그의 말하는 습관이 아쉽다.

그래,

속이 상할   사람에게 고마운 일을 생각하라고 했으렷다?


소재가 '링클 프리'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굳게 다짐을 했다.

앞으로는 '링클 프리' 위주로 구매하도록 권해야겠다고.

아니, 그보다도 애초에 내게 주문했던 셔츠를 입고 가기만 하면 되게 대기시켜 놨는데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로 굳이 새 셔츠를 꺼내어 밤중에 당장 세탁해 달라는 그런 요구는 다음부터 자제해 달라고.


그리고 남편 말마따나 다른 집 여자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들 하니 나는 얌전히 그들의 생생한 제보만 묵묵히 받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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