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영광, 우리 집엔 폭망

아빠는 TMI

by 글임자
22. 12. 25. 친절했으나...

< 사진 임자 = 글임자 >


'긴급 상황! 긴급 상황! 사고 발생! 애들이 택배 봐버렸어. 일단 난 시치미 뗐으니까 이따가 집에 와서도 모른 척해야 돼. 알았지? 엉뚱한 소리 하면 절대 안 돼! 정신 바짝 차려."

급히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ㅇㅇ"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나 했는지 남편은 성의 없는(달랑 저 두 개의 자음은 내게 성의 없게 느껴졌다.) 답장을 보내왔다.

이 사람이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시구만?

"지금 애들이 다 알아차린 것 같단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 줄 알아? 그냥 가만히만 있어. 집에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알았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차라리 나 혼자 재조작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나의 우려와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였으므로, 아이들의 의심이 거의 확신으로 굳어지는 계기가 되는 엉뚱한 말을 하는 통에 그동안의 나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그것은 1차 들통의 시작이었다.


"어? 엄마, 이게 뭔가요? 큐브네. 이거 혹시 내 선물이야? 여기 택배 상자에 4x4 큐브라고 쓰여있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 엄마가 네 생일도 아닌데 선물을 왜 줘?"

"에이, 엄마가 산타 할아버지인 척하고 나 주려고 주문한 거잖아, 맞지?"

"몰라. 아빠한테 물어봐.(= 어디까지나 주문자와 수령자는 모두 네 아빠이고 동일 인물이란다. 그 어디에도 엄마가 가담했다는 흔적은 없어.)"

"누나, 빨리 와 봐. 아빠가 나 주려고 큐브 주문했나 봐. 벌써 왔어! 엄마,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지금 주면 안 되나요? 얼른 보고 싶단 말야."

"엄마는 모른다니까 그러네 자꾸?"

그러나 두 어린이 모두 비로소 확실한 물증을 잡았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엄마의 뻔뻔한 시치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택배로 온 그것을 아이들이 집에 오기 전에 증거를 없앤다는 게 내가 게으름을 피우다가 고스란히 현관에 대놓고 '이건 아드님께서 그동안 애타게 노래하며 기다려 마지않았던 그 큐브입니다.'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이것이 2차 들통이었다.

내 불찰이었다.


며칠 전 집에 도착한 큐브를 증거물로 확보한 후 아들이 끈질기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빠. 이거 아빠가 주문했지? 여기 아빠 이름 있는데?"

"우와? 산타 할아버지가 벌써 선물 사 준 거야?(아니지, 그냥 선물로 주셨다고 했어야지.) 넌 좋겠다. 그 큐브 네가 갖고 싶다던 딱 그 큐브네. 4X4맞지?(너무 본인이 직접 주문했다는 거 티 내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지? 신기하다.(당신은 신기할지 모르지만 난 위기를 느끼고 있어.) 아빠한테 전해주라고 아빠 이름으로 보냈나 보다. 생각할수록 신기하네. (점점 불안해진다. 일을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아들, 정말 좋겠다. 그런데 누나 건? 누나 건 안 왔어?(님아, 그 말만은 제발 하지 마오.) 왜 하나만 왔지?(거기까지만 해 제발.세상엔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이라오.) 누나 것도 와야 하는데.(도가 지나쳐. 그만해.) 더 있다 오려나?(안 왔어도 왔으니까 그쯤에서 멈추시라고!)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인데 왜 이렇게 안 오지?(당신한테 이 중대한 주문을 맡긴 내가 잘못이지.)"

자고로 뭔가 찔리는 게 있으면 말이 장황해지는 법이다.


내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도 당부했건만 어디가 그렇게도 가려우신지 긁어 긁어 부스럼을 만드신다.

"역시, 아빠가 주문한 거였네. 누나 것도 주문한 거야? 아직 로켓 배송이 안 됐나 보다. 눈이 많이 와서 택배가 밀리나 봐. 그렇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주저리주저리 만담을 늘어놓는 아빠 앞에서 아들은 의기양양 해졌다.

마치,

'우리가 그동안은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어 확신하지 못하였으나, 지금 이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모든 사건은 엄마와 아빠가 꾸민 게 분명한 듯하옵니다. 이로써 크리스마스 선물 대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어머니 아버지께옵서는 그만 저희에게 이실직고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동안 우리 남매를 속이느라 몇 년 간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려. 앞으로는 이런 수고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부모님의 노력이 가상하옵니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랬잖아. 왜 그래 진짜? 나한테 다 계획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어. 어떡하지?"

"어떡하긴. 사고는 다 쳐 놓고. 그냥 앞으론 아무튼 가만히만 있어."

"응. 알았어."

이렇게 또 한 번 신신당부하였으나 나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장차 그 양반이 또 대단한 일을 하시리라는 것을.


아들의 큐브는 부랴부랴 내가 신발장에 택배 상자째로 구겨 넣다시피 한쪽 구석으로 집어넣었다.

얼마 후 아들이 물었다.

"어? 이상하네. 여기 있던 큐브가 어디 갔지? 엄마, 엄마가 치웠어?"

"무슨 소리야?"

"아까 여기 현관에 있었잖아. 근데 안 보여."

"모르겠다."

아들과 딸은 온 집안을 뒤졌다.

어설픈 엄마가 숨겼음직한 장소를 샅샅이 뒤지다가 마침내 그 손바닥만 한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냈는지

"히히, 누나 이리 와봐. 여기야."

제 누나 보고 속삭인다고 하는 말이었지만 내 귀에도 또렷이 들려왔다.

결국 현관 신발장에서 그것을 찾아낸 것이다.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과민반응을 했다가는 나만 더 우스워진다.

최대한 침착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그러나 그 누가 보아도 어색하게)

"얘들아, 지금 너희 거기서 뭐 해? 갑자기 신발장에서 뭐 하는 거야?"

라고 평소보다 더 새된 소리로 나의 범행 장소에서 남매를 최대한 멀찍이 떨어뜨렸다.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예 문제의 그것을 들고 현관 밖에 내놓아 버렸다.

차라리 그곳이 우리 집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같다고 확신했다.


딸의 선물은 크리스마스이브날 늦게 도착했다.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나는 딸의 것을 아예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잠든 틈을 타 밖에서 해체한 후 알맹이만 쏙 빼서 전달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들 것도 문밖에 가출해 있는 상태였으므로.

크리스마스이브날 밤을 꼬박 새우겠다는 딸의 결심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더 이상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아이들은 아빠를 범인(?)으로 확정 지었다.

"누나, 이렇게 된 거 그냥 잠이나 자. 어차피 아빠가 산타인 걸 알았잖아. 힘들게 밤새울 필요 없잖아."

"그건 그렇다. 잠이나 자자."

라면서 두 어린이는 올해도 무사히 원하는 선물을 받게 될 것임을 확신하며, 설마설마했던 게 역시나였던 것을 그저 확인한 셈이었으므로 안도하며 그날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김이 빠진 건 나뿐이었다.

남편은 심드렁했고, 아이들은 잔뜩 기대했다가 걱정했다가 결국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이들이 확실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책을 좀 읽다 보니 자정이 가까워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선물'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직 현관 밖에 있는데 말이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잠자리에 누우려는 찰나 퍼뜩 생각이 났다.

아차, 택배!

그날따라 왜 그리도 택배상자를 열어보는 그 성스러운(?) 일이 귀찮던지...

40세의 어떤 남성은 세상 걱정없이 진작에 숙면을 취하신 듯 했으나, 어쩌자고 나만 혼자 애면글면 하고 있는 건지.

딸과 아들에게 사랑의 말 한마디라도 남기면서 편지 한 줄이라도 적어야지 싶었던 계획과는 달리 졸음에 겨워 무지막지하게 택배 상자를 뜯어 알맹이만 쏙 빼냈다.

급히 일을 하려니까 내용물이 쏟아져 차디찬 바닥에 뒹굴고 난리도 아니었다.

무슨 쪽지 같은 게 있는 것을 얼핏 보았으나, '설명서'려니 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것은 3차 들통의 복선이었다.


어제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아이들이 부스럭거리며 애증의 그것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엄마. 이것 봐봐. 정말 선물이 와 있어!"

"그래? 좋겠다. 마음엔 들어?"

"응. 내가 갖고 싶었던 거야."

"그래. 잘 됐네."

"근데 엄마, 이거 아빠가 주문한 거 맞지? 여기 아빠 이름이 있어!"

"어?"

당황해선 안돼.

"여기 무슨 편지 같은 게 있어. '안녕하세요, OO 님... 손발이 시려워지는 계절이네요. 그래서 슬라임도 살짝 단단하게 받아 보실 수 있으니 실온에서 찬 기운을 뺀 후, 플레이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쓰여있는데?"

아뿔싸,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다.

친절한 사장님 덕에 다 들통났다.

3차 들통이다.


아이들이 제 아빠를 깨우러 갔다.

"아빠. 이것 봐봐. 정말 우리 선물이 와 있어. 아빠가 주문한 거 말이야."

"무슨 소리야. 아빠가 주문하긴 뭘 주문했다고 그래?"

"에이, 아빠 여기 아빠 이름이 다 있잖아. 택배 상자에도 아빠 이름이 있었다고."

"산타 할아버지가 아빠 이름을 대표로 해서 보내 주신 거겠지."

남편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둘러대도 이젠 아이들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아빠 덕분에 크리스마스 선물이 조작된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은 가운데, 그 와중에도 엄마는 극구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인하며 매직 큐브와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엔 아이들을 윽박지르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 걸 뭐.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실토하고 좋게 좋게 마무리하자. 이런 어설픈 연기도 지겹다. 진실을 거짓으로 덮는다고 그게 가려질 리가 있나? 다 그만두고 싶다. 정말 귀찮아.'

남편의 어설픈 연기에 애처로움마저 느끼며 나는 그 무언가를 다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야 말았다.


"아이고, 이 사람아. 저걸 그대로 놔두면 어떡해. 저 쪽지만 없앴어도 괜찮았을 텐데."

남편이 내게 한 소리 했다.

"내가 저런 게 들어 있을 줄이나 알았나 뭐. 설명서인 줄 알았지. 나도 몰라. 이젠 다 끝났잖아, 그만해."

"하여튼, 어설퍼가지고는..."

"그만하라고."

남편이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하늘엔 영광, 땅 위엔 평화라더니, 어찌하여 우리 집엔 아침부터 서로 남 탓을 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아이들은 그토록 소원하던 선물을 받은 기쁨에 겨워 오전을 순조롭게 보내고, 질리도록 오전 내내 그 선물들을 마르고 닳도록 만지더니 이내 시들해진 것 같았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마는.

선물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부모 말이라면 재깍재깍 반응하며 착한 아이 옷을 입더니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는 역시나 해이해졌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약발이 떨어졌다.'라고 한다지 아마?


아무리 약발이 떨어졌기로 소니 남편은 잠자코 있었어야만 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얘들아. 너희 어째 태도가 오전하고 많이 다르다? 아휴, 이렇게 갖고 싶다는 선물 사주면 뭐 해, 말도 잘 안 듣는데?"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할 그 말, '내가 범인이 맞소이다.'하고 자백하는 그 성실한 말, 정직함의 극치를 달리는 그 몹쓸 말(그 양반은 저렇게도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기어이 하고야 말았으니.

"거봐. 역시 아빠였네. 아빠가 산 거 맞네. 왜 어린이들한테 거짓말해 아빠는?"

"아니, 그게 아니라 산타 할아버지가 사 줬다 그 말이지."

"에이, 아빠 됐어. 그만해. 이젠 다 알아. 왜 솔직히 말을 못 해?"

"아니라니까 그러네 자꾸? 산타 할아버지가 산 거란 말이지. 아빠가 산 거라고는 안 했잖아. 산타 할아버지가 사서 아빠보고 너희한테 전달해 주라고 보내신 거야."

"알았어. 알았어."

자그마치 4차 들통임과 동시에 아빠가 실언을 내뱉음으로써 가장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고야 말았다.

아이들이 손사래를 쳤다.

나는 차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부모의 거짓말을 자녀들에게 다단계로 들키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의 TMI.

그러게, 제발 그냥 가만히만 있으라고 했잖아.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원.

결혼은 진정 몹쓸 짓이란 말이던가?

아무리 다 들통났어도 마지막 마무리를 그럭저럭 아름답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살짝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 옛날 30년 전 시골에 살았던 나의 부모님과 내겐 이런 추억이 전혀 없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라 했다.

위로가 된다.

우리는 같은 아픔을 간직한 사이.

어쩌면 어린 날의 나의 결핍이 이토록 집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다만 아이들과 추억 거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이젠 다 끝났다.

내년부터 선물 실명제로 하자.

산타 할아버지 차명 선물은 올해로 끝이다, 가족끼리 더 이상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한한 해방감마저 느낀다.

앞으로 더 이상 12월마다 혼자서만 속 끓일 일 없으렷다?

너희가 언제부터 속아주는 척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너희도 고생 많았다.

당분간 20년 정도, 크리스마스 안식년을 즐기리라.

혹시라도 나중에 내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를 위해서 나는 또 뭔가를 계획하고 설레면서도 조마조마해하겠지.

이미 비혼을 선언한 딸과 점점 그쪽으로 기우는 아들을 생각하면 영영 그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업체 사장님의 과한 친절과 아빠의 실언과 엄마의 게으름이 빚은 크리스마스의 폭망...

내가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의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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