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팔불출, 아빠는 팔불출의 제곱

어린이가 공부는 무슨 공부야?

by 글임자
23. 2. 4. 기분전환 되는 방법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오늘 시험 봤는데 어떻게 됐게?"

"글쎄, 과연 어땠을까?."

"자, 먼저 국어 점수가 얼마게?"

"음... 백점?"

"아니야."

"그럼 만점?"

"땡!"

"그럼 혹시, 천만 점?"

"아이, 엄마 그게 뭐야?"

"모르겠다."

"96점이야. 하나 틀렸어. 그거 안 틀렸으면 다 맞을 수 있었는데."

"그 정도면 엄청 잘한 거야."

"그리고 수학이랑 영어, 사회는 다 맞았어."

"엄마는 수학 잘 못했었는데 우리 합격이는 다르네."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뒤져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내민 딸의 호들갑스러움에 나는 진작 알아차렸다.

뭔가 잔뜩 자랑하고 싶은 게 있구나, 하고 말이다.

나는 최대한, 다소 과장된 몸짓과 말로(그러나 딸에게는 엄마의 감출 수 없는 기쁨을 최대한 침착하게 보이도록) 응해주면 충분할 것이었다.


"엄마, 나 내일 네 과목이나 시험 봐."

"그래? 학년 끝난다고 시험 보나 보네."

"국어랑 영어랑 수학이랑 사회 네 과목이야."

"한꺼번에 그렇게나 많이 봐? 부담스럽겠다. 그러니까 오늘은 일찍 자라."

곧 봄방학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곧 한 학년이 마무리가 된다는 뜻이다.

마지막 평가인가 보았다.


"그래? 그럼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딸과 나누는 대화를 저쪽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공부는 무슨 공부? 공부를 안 하고 봐야 제 실력이 나오는 거지. 시험 본다고 공부해서 가면 제대로 실력이 확인될까? 무슨 중 고등학생들 시험도 아니고. 평소 하던 대로 그냥 하다가 시험을 봐야 그게 진짜지. 그리고 꼭 시험 본다고 공부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남편은 내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했지만 ,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렇다.

과거 거의 벼락치기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는 평소에 공부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만을 해 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제야 깨닫게 되었지만 , 공부라는 게 재미도 있는 것이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아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드문데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던 습관이 뒤늦게 아주 많이 아쉬운 것이다.


딸이 공부를 아주 잘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만 온 마음과 힘을 다 쏟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선은,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루 종일 학원을 전전하며 기운 빼고 살기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놀고 싶을 때 실컷 놀고 공부하고 싶을 때 본격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의외로 남편과 의견일치를 본 부분이다.)

미리부터 뭔가에 질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스스로 배움이 즐겁다면, 거기서 흥미를 느낀다면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공부를 하든 무슨 일이든 했으면 한다.


다음 날 네 과목이나 시험을 본다고는 했지만 딸은 무사태평했고, 마치 '시험을 위한 공부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

매일 하는 일을 그저 하고 놀고먹고 자고, 그게 전부다.

하교 후 유일한 사교육인(그것도 사교육 범주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합기도 학원을 다녀와서 일일 학습량이 있는 수학과 영어 공부를 하고, 좋아하는 슬라임 영상을 조금 보고, 월요일에만 30분 허락되는 게임도 하고, 책도 보고, 동생과 놀기도 하고, 혼자 슬라임을 가지고 놀고, 이렇게 하루, 그리고 일주일을 보내는 12살 어린이다.

정말 시험을 대비해서 따로 어떤 준비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았다.

유난 떨지 않고 하던 대로 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비슷한 말 한마디도 나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게 어디 내 공부인가?

딸 공부이고 딸 시험이지.

하지만 남편은 시험이 있으면 그때만이라도 소위 '대비'라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딸은 아빠 의견은 가볍게 흘려 들었고, 내가 그에 적극 동조하였으므로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딸이 어리고 철없을 때의 나처럼 별 생각도 없이 마지못해 공부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나의 부모님도 평생 내게 '공부해라', 이런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옆에서 같이 책을 보고, 새로운 뉴스를 보면 (잘은 몰라도) 이야기해 주고, 매일 영어 공부를 하고 새로 배운 표현을 아이들에게 적용해 보고(역시나 잘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재미있으니까,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냥 내 할 일만 할 따름이다.

종종 좋은 강의를 찾아내면 아이들에게 추천도 하고 같이 보기도 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부해라.'라는 소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다만,

"할 일은 하자."

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게 더 교묘하고 약은 수법인지도 모르겠다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리 어린이라도 해야 할 일들은 있는 법이니까.

놀더라도 할 일은 마친 뒤에다.

"어린이들이 무슨 공부를 해? 얘들아, 어린이들은 실컷 놀아야 돼. 나중에 더 크면 놀고 싶어도 못 놀아."

종종 이런 말도 일삼는다.

뭔가 모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 인생은 아이들 것이라는 점이다.


"엄마, 나랑 다른 친구 한 명이 공동 1등이야. 둘이 4과목에서 하나만 틀렸거든."

"1등인지 아닌지보다 우리 합격이가 평소에 스스로 잘해왔다는 게 더 중요한 거지."

말은 이렇게 해도, 엄마 입장에서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쏘냐.

남들이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이라고 흉봐도 어쩔 수 없다.

기특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너무 딸이 자만하지 않도록 앞에서는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기, 이 정도의 엄마의 이중성은 용서가 되리라.

급히 남편에게 연락을 한다.

있는 사실 그대로 거짓 없이.

이 사실을 알면 남편은 일에 치어 기운이 다 빠져 있다가도 힘이 불끈 솟겠지?

알고 보면 사실 은근히 남편도 자식자랑에 지극정성이시다.


봄방학을 하면 아이들과 조만간 친정에 갈 예정이니 친정 부모님께 자랑하려고 시험지를 따로 잘 보관해 두었다.

남편은 이를 알면 유난 떤다고 또 한 소리 할 것이 뻔하다.

그는 아이들이 상장을 받아오면 그저 카* 사진에 조용히 올리는 소극적인 행동만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것들을 잘 보관했다가 기어코 시가에도 들고 가고야 말 테다.

부모님은 나보고 팔불출이라고는 안 하시겠지?

두 분만 적적하게 지내시는데 외손주들의 재롱잔치에 찰나일지라도 웃음꽃이 필 것이다.

특히, 몇 년간 손수 이유식 만들어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며 한글을 가르치고 숫자도 가르쳤던 외손녀를 앞에 앉히고 외할아버지는 아마도 문제 하나하나 짚어가며 본격적으로 문제풀이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물론 외손녀는 관심도 없어 할 테고.)

딸아, 너는 하던 대로 하거라, 나는 기꺼이 팔불출이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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