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반장 해 볼 거야!

신중해야 하느니라.

by 글임자
23. 3. 1. 중생의 욕심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선생님이 월요일에 반장 선거 한대."

"그래?"

" 나 한 번 반장 해 볼래."

"우리 아들, 반장은 네가 하고 싶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야."

"그럼?"

"먼저 선거에 출마를 해야지."

"어떻게?"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야지."

"그렇구나."

"우리 아들이 반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응."


이렇게나 적극적인 멤버는 우리 집에서 처음이다.

나머지 다른 세 멤버는 소극적이다 못해 존재 자체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에 가깝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아들이 반장이 되면 나는 또 뭘 해야 하지?

이거 정말 부담스러운걸, 남편이 조신하게 없는 듯 있으라고 했는데.

담임 선생님께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 하나, 그나저나 마땅히 입고 갈 드레스가 없는데 이를 어째?

이참에 새 옷을 하나 장만해야 하나?

아들이 효자로세, 덕분에 옷 한 벌 해 입게 생겼으니.

그나저나 요즘 피부 트러블이 생겨서 엉망인데 하필 이런 때에.


"너 반장이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누나가 공격적으로 질문했다.

"반장이 반장이지 뭐."

반장의 실체에 대해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동생은 그 역할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어이구, 반장 하면 얼마나 피곤한데."

"뭐가 피곤해? 하면 좋지."

"선생님이랑 이것저것 해야 되고, 친구들도 많이 도와줘야 되고, 하여튼 안 좋아."

"한 번 해 보는 거지."

"하고 싶다고 다 하는 줄 알아? 친구들이 뽑아 줘야지."

"나가보고 안되면 말지 뭐."


초등학생 인생 5년 차에 접에든 딸은 반장이라든지 회장 같은 것은 전혀 해 본 역사가 없었으나, (한 번도 빈말이라도 해 보겠다는 의사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경험도 없는데 어찌 그리 반장의 삶에 대해 구구절절 자세하게 동생에게 설명해 주는지 듣는 것만으로도 예비 후보자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아들이 한 번 출마해 보고 싶으면 해 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알았어."

"그런데 누나 말대로 꼭 반장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야 돼."

"응."


"우리 아들이 반장선거에 나가보겠다고? 그거 정말 좋은 경험이 되겠다. 하지만 혹시 안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도전해 보겠다는 그 의도도 충분히 대단해. 한 번 잘해 봐!"

남편도 자못 근엄한 아버지의 표정으로 진지하게 조언했다.

평소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을 다 흘려듣는 줄 알았더니 적절한 타이밍에 아빠 역할을 다 해주신다.

사실 퇴근 전에 나는 남편에게 아들이 반장에 도전해 보겠다고 하니 격려의 말이라든지, 힘을 북돋을만한 한 마디 정도를 미리 준비해 오라고 주문했었다.


"근데 우리 아들이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은가 보네?"

"엄마. 반장은 인기로 되는 게 아니야."

그럼 그렇지 딸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딸은 틀린 말은 안 하는 어린이다.

"그래도 친구들한테 인기가 있으면 좀 유리하지 않을까?"

"아니라니까. 반장은 그렇게 뽑는 게 아니야. 공약이라는 게 있어. 친구들 앞에서 반장이 되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 이렇게 약속하는 거, 그걸 잘해야지."

아니 얘가 보자 보자 하니까.

누가 그걸 모른다니?

아직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아 보지 않은 어린이가 지금 국회의원 선거며 대통령 선거를 몇 번이나 치른 엄마를 가르치려 드는 게야?

공약, 물론 아주 중요하지.

"그래. 합격이 네 말이 맞다. 공약이 정말 중요한 거지. 단순히 친구들한테 인기만 있다고 해서 반장이 될 수는 없어. 그래서도 안 되겠지. 앞으로 반장으로서 어떤 역할들을 해 나갈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잘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아무튼 너는 반장 아무나 하는 거 아니란 것만 알아둬."

초등학생도 다 아는 뻔한 사실을 가끔 모르는 어른들도 있다.

'절대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우리 아들은 반장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어?"

"그냥."

"어? 그냥? 이유는 없고?"

"그냥 해 보고 싶어."

"음,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그래도 반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뭔가 준비가 필요할 것 같은데. "

"무슨 준비?"

"친구들한테 너를 뽑아 달라고 해야 하잖아. 누나 말대로 네가 하고 싶다고 무조건 되는 건 아니니까. 친구들이 너를 반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약속 같은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이거지. 선생님이 그런 말씀 안 하셨어?"

"안 하셨는데?"

(하셨는데 안 들은 건 아니고 혹시?)

"그럼 월요일에 선거하기 전에 말씀하시려나?"


"우리 아들은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남달랐어. 그때 선생님들이 항상 다른 친구들을 잘 도와주고 리더십도 있다고 하셨거든. 유치원 다닐 때도 선생님들이 그런 말씀하셨는데. 우리 아들이 반장이 되면 잘할 거야."

"언제 그랬어?"

"엄마랑 네 선생님들이랑 상담할 때 그런 말씀 많이 하셨거든. 의젓하다고 하시면서."

"그랬어?"

"그럼. 꼭 반장이 안되더라도 이번 기회에 좋은 경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야. 아무튼 우리 아들이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엄마는 대견하다."

딸은 꾸준히 그런 걸 뭐 하러 귀찮게 하느냐고 심상하게 말했지만 갈수록 아들은 의지를 굳힌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어린이의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리라.

기꺼이 팔불출로 환골탈태하리라.


그러나,

몇 시간 후,

"엄마. 나 그냥 안 할래."

"어? 왜?"

"그냥."

"그래. 네 일이니까 엄마도 강요는 안 해. 근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

"안 하고 싶어 졌어."

"본인이 싫다면 안 하는 거지. 근데 한 번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아무튼 신중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

"월요일에 가서 생각해 볼게."

"그래, 그래라 그럼."


뭔가 아깝다.

좋은 경험을 해 볼 수도 있었는데.

아직 닥치지도 않은 반장 선거를, 나는 만약 아들이 반장이 되면 친정과 시가 부모님께 당장 전화를 걸어 호들갑을 실컷 떨 준비를 마쳤는데 말이지.

아니, 반장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후보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는 일인데.

반장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질풍노도의 시기가 닥친 것이란 말인가.

어쩜 이렇게 순식간에 변덕을 부릴 수가 있지?

반장이 되면 축하 기념 저녁 메뉴까지 벌써 생각해 뒀는데, 얘야.

또 너무 앞서갔구나 내가.


정말 아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우리 집에서만, 아마도 이 엄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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