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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3. 2022

기관장님,눈이 나빠지는 것 같아요.

그러나 아무 상관없겠죠? 기분 탓이겠죠?

22. 12. 19. 입이 있어도 말 못 하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 사진 임자 = 글임자 >


태초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왜 불이 다 켜져 있어?"

라고 말씀하시면서 off 스위치를 누르고 사무실로 들어오시는 높은 분이 계셨다.

그 옛날 20년도 더 오랜 기억 속에

"Save the energy!"

라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교실 앞문으로 행차하시며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다 돌면서 여고생들의 원성을 사던 영어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의 성함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한마디만은 여전히 '내 서늘한 가슴속에' 있었으니.


위 사건은, 공무원 발령을 받고 나의 두 번째 근무지가 된 곳에서 만난 기관장님과의 인상적인 일화이다.

물론 한밤 중에 근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내에 불이 켜져 있지 않다고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 불빛으로도 어떻게든 연명해 갈 수는 있었다.


어제는 날이 흐렸다.

폭설, 강풍, 강추위, 노약자 외출 금지 등등(한마디로 나보고 집에 조신하게 있으렴, 하고 권하는)의 다소 겁을 먹게 만드는 안전 문자가 쏟아지던 하루였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전에 지레 조심하게끔 걸핏하면 문자를 쏟아부으면서 마중물을 퍼 올리는 것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시베리아 벌판이 이와 같을까 싶게, 눈보라 몰아치는 아귀지옥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느껴질 만큼 무섭게 폭설이 쏟아지다가는 이내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말갛게 갠 하늘에 해님이 반짝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먹구름이 낀다.

이런 날씨에는 하는 것도  없이 몸까지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날은 민원인들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오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면서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지만) 날씨에 예민한 동물이다.

약간 우중충한 날씨, 흐린 날은 괜스레 기분도 처지는데 불이라도 환~히 밝고 살고 싶다.

내가 느끼기엔 그분은 아주 에너지 절약 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소등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셨다.

밝은 대낮에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보통 사무실 실내는 불을 끄고 생활했다.

해가 떠 있으면 당연하게.


문제는 어제처럼 날이 우중충하고 시야도 흐릿해지는 그런 날까지도 굳이 에너지 절약을 원하시는 것이다.

가끔 보면 흐린 날은 차라리 밖이 더 밝게 느껴지기도 했다. 착각이겠지.

실내는 많이 어둡다.(어둡다기보다 우중충하고 눈에서 눈곱을 안 뗀 것처럼 선명하지가 않다.)


"대낮에 왜 불을 다 켜고 있어?"

대낮이라도 흐린 날이거나 실내가 어두웠으니까 불을 켜지 않았을까?

그나마 창가에 앉은 선택받은 직원들은 바깥 빛이라도 좀 받을 수 있지, 내 자리는 사무실 가장 안쪽인 데다가 뒤엔 벽이 시커멓게 자리 잡고 있어 대낮이어도 뭔가 밝은 느낌이 없었다.

리미티드 에디션보다 더한 소유욕에 불을 지피는 리미티드 창가자리.

 세 명에게만 허락되는 한정판.

참으로 욕심났었다.

명품은 관심 없으나 명당은 본능이 원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내 존재를 숨기려고 하는 게 아닌 가 싶게 외딴곳, 나는 그 자리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영구보존 비밀문서라도 남몰래 작성해야 했던 것일까?

어쩌면 나의 비밀 보장을 완벽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러셨을지도 모른다.

시보를 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나는 평소에도 하고 싶은 말은 다 못 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에너지 절약만 중요하고, 직원들의 눈 건강은 안중에 없는 건가?

"아니, 에너지 절약도 좋지만 날이 이렇게 흐린데, 불을 다 꺼버리면 어떡해? 에너지 절약하는 돈보다 직원들 눈 나빠져서 들어가는 병원비가 더 들겠다."

나는 옆 직원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했다.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시는 기관장님이 통솔하시는 직원은 말하는 에너지도 절약해야 했으므로, 가만히 속삭여야만 했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모르시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솔직히 사무실 불 몇 개 끈다고 엄청난 에너지가 절약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한전에서 행여라도 꼼꼼히 비교 분석한 데이터를 들이밀며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에너지 절감에 매우 기여한다고 증거자료라도 내놓는다면 나는 또 할 말이 없다마는.

흥청망청 탕진하자는 것도 아니다.

에너지 절약은 절약이고, 취지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실천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단순히 에너지 절약하자고 직원들의 눈 건강은 뒷전이시니 너무하십니다 그려."

라고 이제야 말할 수 있다, 그것도 여기에서만.

그게 진정한 절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좁은 사무실에서 대략 스무 명이 안 되는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민원실은 별도로 장소가 있었다.

한 사람의 (과연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이 적절하고도 타당한지 의아한) 신념 (혹은 권력)으로 직원들의 눈 건강이 위협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몇몇의 직원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은 하지만, 우리끼리는 속닥거리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너무 어두워요. 불 좀 환히 켜고 근무하고 싶습니다!"

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 어두침침해서 그분이 어느 방향에 계셨는지 몰라서 그랬겠지 아마도?


화창한 날은 당연히 전체 불은 다 꺼진다.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정도이므로 그 정도는 괜찮다.

그런 날까지 실내 불을 다 켜고 환히 밝히는 것은 정말 에너지 낭비며 그것은 햇볕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구가 많이 아프다.

나름 에너지를 절약하려고 노력 중이고, 아픈 지구도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무엇이든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

날씨도 우중충한데 사무실 실내의 불을 한두 군데만 켜서 칙칙하기 그지없는 근무환경,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사무실 살림을 하는 데 있어서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직원들의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은 적극 찬성이다.

기관장의 성향에 따라 직원들의 근무환경의 질이 달라진다고 절실히 느꼈던 경우다.

종종 민원인들이나 이장님들이,

"여기는 왜 이렇게 캄캄해? 불 좀 켜고 살아."

이래야만 눈치 안 보고 불을 켜기 위해 벌떡 일어설 수 있다.

기관장이 누른 스위치는 감히 직원이 함부로 켜려고 다시 누르기가 쉽지 않다.

후미진 내 구석 자리를 탓해야만 한다.

그 이후로 다른 근무지에서도 일을 해 봤지만 저런 경우는 다시 재발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분도 나깊은 뜻이 있으셔서 그러셨겠지만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른이 넘었는데 눈이 나빠질 때도 됐지 뭐.

연관 지어선 안돼.

눈 건강에 안 좋은 행동들을 일삼으면서 하루에 몇 시간씩 사무실 전등 좀 끈 것 가지고 탓할 일은 아니지.

눈을 밝혀준다는 음식을 잔뜩 챙겨 먹었어야지 누굴 탓해?

그때 그것 때문이 아닐 것이야,

노안이 온 게야.

사무실이 어두웠던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없고 말고.

그래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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