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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13. 2023

인사이동하면, 일단 찍어 둬.

후임자가 할 수 있는 일

23. 1. 13. 후임자가 믿는 구석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어떡하지? 녹음 못했어."

"내가 무조건 하라고 했잖아."

"그게 거기 가니까 정신이 없더라."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누르고 갔어야지."

"그러게."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걸 안 하면 어떡해?"

"그래도 전임자가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 누르기가 좀 그렇더라고."

"그렇긴 뭐가 그래. 그냥 녹음 좀 하겠다 하고 하면 되는 거지."

"사람 앞에 두고 그렇게 하기가 좀 그래서."

"난 모르겠다. 녹음한 거 들으면서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판에. 알아서 해."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업무를 맡은 남편과 인수인계를 대하는 아내의 대화이다.


작년에 복직을 했을 때 그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았다.

지금도 형식상으로는 업무 인수인계서가 있긴 하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통 감이 안 올 때가 있다.

나는 전임자가 일목요연하게 자료를 정리해서 주기도 했거니와 현재 진행 중인 사업 내용이라든지 순차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알아보기 좋게 넘겨주어서 일 년 동안 그 업무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지 대략적인 부분은 알 수가 있었다.

이렇듯 후임자에게 도움을 주는 전임자가 있는가 하면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후임자에게 다 떠넘기다시피 하면서 사고만 잔뜩 치고 떠나는 전임자도 물론 있다.


작년 그때 저녁에 초과 근무를 하면서 (당장 내가 닥쳐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예산 관련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 다른 직원들에게 그에 관해 물었었다.

워낙에 건망증도 심한 데다가 안 해 본 분야라서 용어 자체도 낯설었고 받아 적기만 한다고 해서 나중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낼 용한 재주는 내게 없었기에 동영상을 찍었다.

직장 내 동영상이라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겠다.

물론 상대 직원의 목소리만 담았고 미리 양해를 구했으며 구술로 합의를 봤고, 업무상 필요한 것만 그 직원의 설명을 따라 짧게 찍은 것이다.


"요즘엔 이렇게도 인수인계해."

한 직원이 말했다.

그전에 근무할 때도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는 일단 찍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전임자에게 넘겨받을 때는 다 알아들은 것 같고 당장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단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기억나는 게 없었다. 받아 적는 그 말도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적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동영상을 찍는 것이었다.

그것은 꽤 효과적인 인수인계 방법이었다.

인수인계서가 있고 동영상 자료까지 있으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물로 실전에 들어가면 또 한동안 헤매기도 했지만 말이다.

넘겨받은 자료와 동영상을 서로 맞춰가며 업무를 파악하면 한결 수월했다.

그때가 떠올라서 이번에 나름 남편에게 고급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요즘은 동영상으로 찍어서 많이 업무 전달받기도 한다더라. 나도 전에 그렇게 했었어."

"그래? 난 생각도 못 했는데."

"그냥 말로만 전달받고 메모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이야. 이번에 가면 그렇게 해 봐."

"진짜 괜찮은 방법이네."

"해보니까 확실히 좋더라니까. 전임자 만날 때 그렇게 한 번 해 봐."

"그래야겠다 정말."

그렇게 나는 남편에게 신문물을 전달하고 그를 계몽시키기에 충분했다고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는 일은 내 맘 같지 않고 더군다나 남편은 정말이지 내 맘 같지가 않았다.

전임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전임자가 오라고 해서 말이야."

"그럼 뭐라도 챙겨 가야지."

"업무 일지 남는 거 없나?"

"최근 건 없고 집에 옛날 거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옛날 걸 가져가?"

"가서 전달 잘 받아 오는 게 중요하지 옛날 거면 뭐 어때?"

"그래도 그게 아니지."

도무지 내 상식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태도를 보였지만 어차피 남편 일이니 내가 더 간섭할 일도 아니었다.

"그럼 녹음이나 잘하셔."


나도 남편이 내 말을 착실히 따르리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지난 업무 일지는 차마 못 가져가겠다며 그가 챙겨 간 것은 결재판에 A4용지를 달랑 끼운 게 다였다.

"그거보다 차라리 옛날 거라도 업무 일지 가져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다가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그리고 양이 많아질 수도 있는데..."

"이 정도면 돼."


내가 전에 인사이동이 있을 때를 생각하면 전임자의 말 중에서 기침 소리 하나 빠뜨리지 않으리란 각오로 무조건 기록을 했으므로 한두 장의 백지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 둘은 일하는 방식이 아주 달랐다.

그리고 서로 상대의 말을 잘 새겨듣지도 않았던 것 같다.

'녹음만 잘해 오면 나중에 차분히 다시 들으면서 메모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판단 오류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남편은 망연자실했다.

"나 녹음 하나도 못했어."

내가 다 안타까웠다.

그렇잖아도 태어나서 처음 맡은 업무라 정신없을 텐데 그거라도 붙잡아야 출근할 수 있을 텐데 그걸 안 하면 어쩐단 말이더냐.

내가 따라가서 살포시 눌러주고 왔어야 했나?

남편 몰래 주머니 안쪽에 도청 장치라도 장착했어야 했나?

한글인지 외국어인지도 모를 결재판 위의 어지러운 문자들을 보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적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심정 나도 잘 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 기분이라니.

"아휴, 닥치면 하겠지 뭐. 본다고 아나? 모르면 물어보고 해야지 어쩔 수 없지."

"전임자도 모르면 전화하라고 하긴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자꾸 전화해서 물어보면 다들 안 좋아해. 알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길래 왜 그 중요한 녹음을 안 하고 온 거야 도대체? 내가 미리 귀띔해 줬으면 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녹음을 했어야지. 나 같으면 집에서부터 누르고 출발했겠다. 어차피 들어도 모르고 봐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있으면 그나마 좀 나을 거 아냐? 전화해서 물어보더라도 뭘 좀 알고 물어봐야지 다짜고짜 전화해서 엉뚱한 소리만 할 거야? 대체 왜 내 말이라면 죽어라고 안 듣는 거야? 내가 챙겨 준 보람도 없이 이게 뭐야?"

라고는 몰아세우지 않았다 물론.


업무 인수인계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실무에 바로 쓸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소하기까지 해도 좋을(시시콜콜할수록 적극 환영하게 되는) 체계적인 업무 지침서, 특히나 오늘 ㄹ령받은 ㅅㄴ규자라도 한글만 알고 컴퓨터를 다룰 줄만 알면 바로 어느 누가 당장 그 자리에 앉더라도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런 꿈의 '동아전과'같은 그런 것은 직장에 존재할 수 없는 일일까.


출장을 갔다가도 한밤중에 돌아와 급한 요청 자료를 제출한다고 헐레벌떡 귀가하는 사람, 어제도 오늘도 퇴근 시간이 밤 11시를 훌쩍  넘긴 사람,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사람, 주말에도 출근이 확실시되는 사람, 다음 주에 또 며칠간 출장이 잡혀 있다는 사람, 일만 해서 안쓰러운 대한민국의 어느 과로하는 직장인, 녹음 화면 한 번을 터치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돌아온 후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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