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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22. 2023

눈 높으신 장인어른이 고른 사과나무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

2023. 4. 3. 그때 다른 가지엔 벌써 꽃  필 준비중

< 사진 임자= 글임자 >


"나무를 언제 심어야 되지? 지금 심으면 되나?"

"벌써 심으믄 추워서 잘못하믄 얼어 죽는다. 날이 더 따뜻해지믄 심어야제. 너는 말로만 다 심냐? 나무도 심는 시기가 다 있는 것이제."

"그런가?"

"아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무슨 나무는 심는다고."


아빠가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쉬실 만도 했다.

사과나무를 합격이의 탄생 기념수로 정하고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벌써 사과 꽃도 보고 사과도 한 바구니 가득 딴지 오래다. 사과잼도 만들어 빵에 발라먹는 중이었다.

앞서 가도 너무 앞서갔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미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심고 싶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심어야 빨리 클 텐데. 언제 심을까?"

남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이 온통 사과나무에 쏠려 있었다.

아빠 말씀처럼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인데 마음만 급해졌다.

"난 잘 모르겠는데? 아버님한테 한 번 여쭤봐."

남편은 강 건너 남의 집 사과 따 먹듯 했다.

어째 태도가 좀 불량한걸?

남의 아기도 아니고 자그마치 우리 첫아기 기념수를 심는 대단히 역사적인 일인데 이리도 무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임신했을 때 서운한 마음은 평생 간다는데, 그런 얘기도 못 들어보셨나?

자다가도 토하면서 입덧만 미치도록 하고 나만 고생했지 남편은 옆에서 뭐 했더라?

남들은 한밤중에 자다가도 아내가 특정 음식을 요구하면 벌떡 일어나 남편이 그것을 대령한다는데(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내게는 전혀 일어날 법하지 않은 남들에게만 훈훈한 미담일 뿐이다.) 얼토당토않은 음식 한 번 요구한 적도 없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대하기 쉬운 임신부를 아내로 둔 사람이 바로 남편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내 대신 입덧을 대신하는 남편도 있다는데 (또 확인되지 않은 근거 없는) 그런 미담도 못 들어보셨나?

내 말에 맞장구쳐 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사과를 따 오면 가장 먼저 맛볼 사람이 아마도 그 남편이 틀림없으리라 확신하는데 말이다.

"우리 합격이 사과나무지 아빠 사과나무야? 우리가 심기로 했잖아. 좀 알아보고 심어야지!"

나는 남편을 몰아세웠다.

나는 이런 걸(무언가 심고 키우고 가꾸고 꽃도 보고 열매도 수확하는 전형적인 시골스러운 생활)을 아주 좋아한다.

반면에 같은 시골 출신이면서도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농사지을 능력은 더욱 없으며  심지어 귀찮아하기까지 하는 남편은 이런 나를 종종 이해할 수 없어했다.

남편과 사귀기 시작하던 초반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 닭들이 달걀을 몇 개 낳았고, 병아리가 몇 마리 부화했고, 소 뿔이 굽어서 내가 톱으로 잘라줬고, 쑥을 캐서 전도 부쳐 먹었고, 녹차를 땄는데 어쩌고 저쩌고..."

시시콜콜 저런 얘기들을 늘어놓을 때마다 그는

"그런 얘기 말고 우리 얘기 좀 하자."

라며 다소 못마땅해하곤 했었다.

그러니까 서로의 관심사가 많이도 달랐던 것이다.

과연 살아보니, 정말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아니, 그냥, '우린 서로 안 맞는다',라고 해두자.


"아빠, 이젠 나무 사러 가야 되는 거 아닌가?"

"가긴 가야 쓰겄다. 인자 날도 따숩고. 심어야제."

'우리가 사서 심겠다.'라고 해놓고 건수만 있으면 아빠를 귀찮게 했다.

아니, 전적으로 아빠에게 의지했다.

사위가 너무 뒷짐만 지고 있으니 딸이라도 나서야지 별수 있나.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는 나무를, 몰랐다.

모르는 것은 나무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좋은 나무를 고를 안목도 없었거니와 뜨내기 구경꾼으로 5일장을 방문했다가 덤터기만 쓰고 오기 일쑤였다.

"그럼 우리랑 같이 장에 갑시다."

뒷짐만 지고 내 눈에는 비협조적으로만 보이던 남편이 잽싸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모태 장돌뱅이의 피라도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장날 구경하기를 아주아주 좋아한다.

"하여튼 자긴 그런 거 진짜 좋아하더라?"

요즘도 남편에게 심심찮게 듣는 소리다.

"흥, 옛날 그 여자는 차도녀 스타일이었던가 보지? 사지도 못하는 거 구경도 못해?"

밑도 끝도 없이 느닷없는 볼멘소리로 내가 톡 쏘아붙이면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쩌면 포기한다는 듯이,

"간 곳에  가고 또 가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어? 자긴 백 번을 가도 또 가고 싶어 할 사람이야.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뭔가 캐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그의 과거를 들추는데도 쉽사리 걸려들지 않고 나의 질문에 용케도 잘 빠져나간다.

"구경하는 거 재미있잖아. 꼭 사야만 맛인가,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지. 물론 자기가 사 주면 더 좋고!"

이렇게 급히 마무리를 지어야만 한다.

만에 하나 남편이

"어랍쇼! 그러는 자기는, 옛날 그 남자는 굉장히 시골스러웠나 보지? 도대체 둘이서 5일마다 어느 장터를 그렇게 돌아다닌 거야?"

라고 득달같이 달려들기 전에 말이다.

"하여튼 특이한 사람이야. 확실히 자긴 노멀은 아니야."

"그런 나랑 사는 자기는 더 특이한 사람이지. 노멀에서 한참 벗어나는 거 알지?"


아빠를 모시고 친정 근처 5일장을 찾았다.

10여 년 전의 그날, 완연한 봄 날씨에 사람들이 바글댔고(그때는 최근 몇 년처럼 몹쓸 역병이  창궐하듯  그 무엇이 사방팔방에 돌지 않았던 평화로운 때였다.) 도로변에 앙증맞은 꽃나무부터 커다란 유실수 묘목까지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만물상이 바로 그곳이었다.

이제 사과나무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름표를 붙여 놓지 않으면 사과나무인지 옻나무인지조차 구별 못하는 내가 거기서 딱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저 아빠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제법 까다롭게 질문하고 묘목을 고르는 아빠의 참관인(내지는 참견인) 역할이 제격이었다.

아빠가 뭔가 질문하면 나의 무지가 탄로 나지 않을 정도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서 덩달아 교양 있게(물론 나만 교양 있는 거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추가 질문을  한두 가지 하는 것이다.(물론 나의 질문들은 상인들에게 가볍게 무시되기 일쑤였다. 내가 허술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나 보다.)

그리고 아빠가 고르신 사과나무 가격을 지불하는 정도랄까?


온 장터를 다 뒤지고 뒤져 드디어 아빠 마음에 드는(아빠가 마음에 드셨다면 우리 마음에도 든 거다. 모르면 아빠를 믿고 따를 수밖에) 사과나무를 발견했다.

"그거 알아? 아버님 은근히 까다로우신 거? 어지간한 건 눈에도 안 차시는 분이야. 진짜 눈이 높으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말이 맞아. 정말 어쩔 땐 우리 아빠지만 너무  까다로우셔. 사실 자기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도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으셨어."

라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시를 회상하며 한치의 거짓도 없이  그에게 전달했다.

딸 가진 아빠들의 알 수 없는 범국민적인 자부심,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긴, 처음에 사귄 남자친구를 데리고 갔을 때도 맘에 안 들어  하긴 하셨어. 아빠들이  대부분 그런다더라. 다들 부모님은 자기 자식들이 최고라고 착각들 하시잖아?"

라며 위로도 아닌, 말인지 막걸리인지도 모를 말을 과감하게 은근슬쩍 덧붙였다, 물론.


정작 당시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아야 했다.

난데없이  사위에 대한 장인의 못마땅함을 털어놓는 날이 아니라 그날은 첫 외손녀를 위한 귀한 선물을 고르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아름다운 봄날이었으니까.

아직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외손녀지만 사과나무를 고르는 그 손길에서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빠도 그 누구보다 그 손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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