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스승의 날이 딸의 생일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선물을 잔뜩 받을 거라는 딸의 예상과는 달리(그러나 나는 예감했다. 월요일이라 주말 동안 딸의 생일은 친구들 안중에 없었으리라는 걸) 한 친구에게서만 선물을 받아왔었다.
그리고 어제 하교한 딸은 방물장수가 신상품을 소개하듯 내 앞에 받은 선물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중에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은 생수 한 병이었다.
"친구들이 선물도 골고루 줬네. 근데 물 준 친구는 남자 친구(그러니까 내 말의 의미는 남자 사람 친구를 뜻한다.)잖아?"
"그렇지."
"왜 그 친구가 너한테 선물을 줬지? 나머진 다 여자 친구들이 줬는데?"
"나도 몰라!"
"혹시 우리 합격이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동안 여자 친구들이 남자 친구한테 선물 받은 적은 없지? 너밖에 없잖아. 그 말은 곧 그 친구가 너한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때 공개 수업 때 가서 보니까 네 뒷자리에 앉아서 너랑 수업하면서 얘기도 잘하던데 너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 엄마 눈은 못 속여! 보통 관심 있는 게 아닌 거 같던데? 넌 그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니? 성격도 좋아 보이고 다른 친구들하고도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어때? 엄마가 보기엔 괜찮더라마는. "
이라고는, 김칫국 무한 리필해 가며 성급하게 딸의 마음을 떠보지는 않았다, 물론.
"합격아, 그 친구가 반장이지?"
"응."
"그래? 그 친구는 어떤 친구야?(=넌 그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응?"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냐고?(=네 남자친구로서 어떤가 묻는 거야.)"
"나도 몰라!"
어라? 얘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원래 그런 거야.
너만 할 때는 괜히 이성에게 관심이 있어도 없는 척, 좋아도 안 좋은 척, 오히려 더 시치미 떼고 쌀쌀맞게 굴기도 하거든.
5학년이면 그럴 만도 한 나이지.
엄마도 그 마음 잘 알지. 아무렴, 알고 말고.
"근데 왜 생일 선물로 물을 준 걸까? 무슨 뜻일까?"
"그냥 줬어. 어제 내 생일인데 선물을 안 가져왔대. 그래서 가방에서 물 꺼내서 나 주려다가 목말라서 그냥 자기가 마셨어. 그리고 오늘 다시 새로 가져와서 나 준거야."
오호라, 남자애가 딸에게 보통 마음이 있는 게 아니네?(라고 나 혼자만 또 김칫국을 무한리필했다.)
딸에게 마음이 없다면 다음날 굳이 그 '물'을 챙겨 오는 수고로움 같은 거 하지 않았을 텐데,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기필코 하고야 마는 의지의 초등생이구나.
"그래?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의미는 무슨 의미? 선물이잖아 그냥."
"엄마 말은 왜 하필이면 물이냐 이거지."
"물도 선물은 선물이지. 선'물'!"
"아하, 그렇구나."
어쩜, 누굴 닮아 저리도 재치가 있담?
이런 재치꾼을 누가 낳았는고?
이런 모습에 그 친구가 반한 건가?
거침없이, 배부르게, 김칫국을 무한리필한다, 화수분마냥.
"근데 그 친구도 곧 생일이지? 다음 주라 했나?"
어맛?
나도 은근히 그 친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네?
5월에 생일 있는 친구들 리스트를 읊을 때 나는 귀신같이 그 친구의 생일을 귀 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응. 다음 주 월요일일걸 아마?"
"너도 역시 그 애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그 많은 친구들 중에 콕 찍어 그 친구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그래. 둘이 친하게 잘 지내봐. 엄마가 그날 보니까 너무 까불지도 않고 진중해 보이는 게 애가 참 괜찮더라. 엄마가 팍팍 밀어 줄게. 그 정도면 합격이야. 어쩜 우리 합격이한테 딱 어울리네. 엄만 너무 까불까불하는 건 좀 그렇더라. 너랑도 잘 어울리겠어."
라는, 남편이 들으면 무슨 쓰잘데기 없는 소리냐고,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펄쩍 뛸 그런 말 같은 건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물론.
하긴 한 번 봐서는 모르지, 사람을. 적어도 서 너 번은 만나 봐야지.
게다가 난 공개수업 날에 먼발치서 뒤통수만 실컷 보고 온 게 다잖아?
"엄마, 나도 그럼 선물 줘야겠네?"
"주면 좋지. 뭘 줄 거야?"
"그냥 나도 물 줄까?"
"물을 준다고?"
"그 애도 나한테 물을 줬으니까."
"그래 너 알아서 해라."
"이거 다시 그대로 줘야지."
이건 뭐 결혼 날 받아 놓고 받은 혼수를 도로 물리는 상황도 아니고 선물 받은 물을 다시 고스란히 되돌려줌으로써 생일 선물을 하겠다니.
이 얼마나 공평한 처사인가.
아니지, 거절의 의사표시인가?
거절하다니? 도대체 무엇을?
아닐 거야, 그저 같은 선물을 하는 걸로 서로 부담을 없애자는 취지일 거야.
그래, 선물 오가는 건 서로 비슷비슷해야 탈이 없겠지. 한쪽이 너무 기울어도 안 되는 법이니까.
그리하여 딸은 남자 사람 친구에게서 받은 생수 한 병을 도로 가방 속에 착실히 넣었다.
그나저나 조만간 씨암탉이라도 잡아야 하나?
다행히 친정에 닭들이 잘 자라고 있다. 든든한 상시 대기조가 있다.
물론 소유자인 아빠의 허락 같은 건 구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곤란할 데가!
이건 좀 이른데?
난 아직 딸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말이다.
우리 딸은 닭을 매우 사랑하고 닭고기도 사랑해 마지않지만 그 남자 친구도 좋아하려나?
슬쩍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나?
주책맞은 엄마는 혼자서 앞서가도 너무 앞서가면서 봄볕에 토실토실 살이 오른 친정집 닭들을 한참이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