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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17. 2023

선'물' 돌려 막기, 신박한 생일 선물

오는 선물이 물이면 가는 선물도 물이다.

2023. 5. 16. 생일 선'물'을 받았다.

< 사진 임자 = 글임자 >


"물도 선물 받은 거야?"

"응. 생일 선물이야."

"그래? 물을 선물한 친구도 있구나. 누가 준 거야?"

"000가 줬어."

"그랬구나. 친구들이 선물 많이 줬네."


월요일 스승의 날이 딸의 생일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선물을 잔뜩 받을 거라는 딸의 예상과는 달리(그러나 나는 예감했다. 월요일이라 주말 동안 딸의 생일은 친구들 안중에 없었으리라는 걸) 한 친구에게서만 선물을 받아왔었다.

그리고 어제 하교한 딸은 방물장수가 신상품을 소개하듯 내 앞에 받은 선물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중에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은 생수 한 병이었다.


"친구들이 선물도 골고루 줬네. 근데 물 준 친구는 남자 친구(그러니까 내 말의 의미는 남자 사람 친구를 뜻한다.)잖아?"

"그렇지."

"왜 그 친구가 너한테 선물을 줬지? 나머진 다 여자 친구들이 줬는데?"

"나도 몰라!"

"혹시 우리 합격이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동안 여자 친구들이 남자 친구한테 선물 받은 적은 없지? 너밖에 없잖아. 그 말은 곧 그 친구가 너한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때 공개 수업 때 가서 보니까 네 뒷자리에 앉아서 너랑 수업하면서 얘기도 잘하던데 너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 엄마 눈은 못 속여! 보통 관심 있는 게 아닌 거 같던데? 넌 그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니? 성격도 좋아 보이고 다른 친구들하고도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어때? 엄마가 보기엔 괜찮더라마는. "

이라고는, 김칫국 무한 리필해 가며 성급하게 딸의 마음을 떠보지는 않았다, 물론.


"합격아, 그 친구가 반장이지?"

"응."

"그래? 그 친구는 어떤 친구야?(=넌 그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응?"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냐고?(=네 남자친구로서 어떤가 묻는 거야.)"

"나도 몰라!"

어라? 얘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원래 그런 거야.

너만 할 때는 괜히 이성에게 관심이 있어도 없는 척, 좋아도 안 좋은 척, 오히려 더 시치미 떼고 쌀쌀맞게 굴기도 하거든.

5학년이면 그럴 만도 한 나이지.

엄마도 그 마음 잘 알지. 아무렴, 알고 말고.

"근데 왜 생일 선물로 물을 준 걸까? 무슨 뜻일까?"

"그냥 줬어. 어제 내 생일인데 선물을 안 가져왔대. 그래서 가방에서 물 꺼내서 나 주려다가 목말라서 그냥 자기가 마셨어. 그리고 오늘 다시 새로 가져와서 나 준거야."

오호라, 남자애가 딸에게 보통 마음이 있는 게 아니네?(라고 나 혼자만 또 김칫국을 무한리필했다.)

딸에게 마음이 없다면 다음날 굳이 그 '물'을 챙겨 오는 수고로움 같은 거 하지 않았을 텐데,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기필코 하고야 마는 의지의 초등생이구나.

"그래?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의미는 무슨 의미? 선물이잖아 그냥."

"엄마 말은 왜 하필이면 물이냐 이거지."

"물도 선물은 선물이지. 선'물'!"

"아하, 그렇구나."

어쩜, 누굴 닮아 저리도 재치가 있담?

이런 재치꾼을 누가 낳았는고?

이런 모습에 그 친구가 반한 건가?

거침없이, 배부르게, 김칫국을 무한리필한다, 화수분마냥.


"근데 그 친구도 곧 생일이지? 다음 주라 했나?"

어맛?

나도 은근히 그 친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네?

5월에 생일 있는 친구들 리스트를 읊을 때 나는 귀신같이 그 친구의 생일을 귀 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응. 다음 주 월요일일걸 아마?"

"너도 역시 그 애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그 많은 친구들 중에 콕 찍어 그 친구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그래. 둘이 친하게 잘 지내봐. 엄마가 그날 보니까 너무 까불지도 않고 진중해 보이는 게 애가 참 괜찮더라. 엄마가 팍팍 밀어 줄게. 그 정도면 합격이야. 어쩜 우리 합격이한테 딱 어울리네. 엄만 너무 까불까불하는 건 좀 그렇더라. 너랑도 잘 어울리겠어."

라는, 남편이 들으면 무슨 쓰잘데기 없는 소리냐고,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펄쩍 뛸 그런 말 같은 건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물론.

하긴 한 번 봐서는 모르지, 사람을. 적어도 서 너 번은 만나 봐야지.

게다가 난 공개수업 날에 먼발치서 뒤통수만 실컷 보고 온 게 다잖아?


"엄마, 나도 그럼 선물 줘야겠네?"

"주면 좋지. 뭘 줄 거야?"

"그냥 나도 물 줄까?"

"물을 준다고?"

"그 애도 나한테 물을 줬으니까."

"그래 너 알아서 해라."

"이거 다시 그대로 줘야지."

이건 뭐 결혼 날 받아 놓고 받은 혼수를 도로 물리는 상황도 아니고 선물 받은 물을 다시 고스란히 되돌려줌으로써 생일 선물을 하겠다니.

이 얼마나 공평한 처사인가.

아니지, 거절의 의사표시인가?

거절하다니? 도대체 무엇을?

아닐 거야, 그저 같은 선물을 하는 걸로 서로 부담을 없애자는 취지일 거야.

그래, 선물 오가는 건 서로 비슷비슷해야 탈이 없겠지. 한쪽이 너무 기울어도 안 되는 법이니까.

그리하여 딸은 남자 사람 친구에게서 받은 생수 한 병을 도로 가방 속에 착실히 넣었다.


그나저나 조만간 씨암탉이라도 잡아야 하나?

다행히 친정에 닭들이 잘 자라고 있다. 든든한 상시 대기조가 있다.

물론 소유자인 아빠의 허락 같은 건 구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곤란할 데가!

이건 좀 이른데?

난 아직 딸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말이다.

우리 딸은 닭을 매우 사랑하고 닭고기도 사랑해 마지않지만 그 남자 친구도 좋아하려나?

슬쩍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나?

주책맞은 엄마는 혼자서 앞서가도 너무 앞서가면서 봄볕에 토실토실 살이 오른 친정집 닭들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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