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자연으로 돌아가다

아직은 너무나 이른 이별

by 엘 리브로

장례식장에 빈자리가 없어서, 아버지가 검은 천에 둘러싸인 채 장의업체의 차량에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 아버지를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다니... 나와 남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고, 입관식을 못 하니 아무도 아버지의 얼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병동으로 가는 도중에 동생들에게 연락을 했다. 10개월 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여동생은 바로 그날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며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 한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자기의 코로나 확진 과정과 증상, 회사 근무환경의 열악함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뿐이었다.

잠 못 이루며 아버지를 생각하고 눈물짓고 있던 나는 새벽의 고요함을 뚫고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언니, 검색해 봤더니 코로나로 죽으면 정부에서 지원금 천만 원을 준대!"

"그래, 그런다더라. 담에 신청해야겠지..."

"그거 있잖아, 동사무소에서..."

"알았어, 시간이 늦었다. 담에 얘기해라.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해."


부모도 형제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산다. 가족이기에 더 큰마음의 상처를 입고 그것을 평생 끌어안고 키우며 힘들어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다 무슨 소용인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할 만큼 미움이 사무쳤다면,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그 깊은 감정의 골에서 벗어날 것인지 묻고 싶다.



거의 잠을 못 이루고 날이 밝았다. 아버지가 계셨던, 그리고 내가 한때 근무했었던 요양병원에 다시 갔다. 퇴원비를 정산하고 사망 증명서를 발급받아 장례식장에 제출해야 했다. 원무과 데스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며 또 눈물이 났다. 로비를 지나가던 간호부장의 인사를 받자 눈물이 더 쏟아졌다.

"안타깝다.", "너무 갑작스럽다.", "마음 잘 추슬러라.", "잘 보내드려라."...

무슨 말을 들어도 목이 메었다.

'아... 아버지! 몇 시간 전만 해도 바로 위층의 병실에 누워 계셨는데, 지금 아버지는 차갑게 굳은 몸으로 컴컴한 관 속에 누워 계시다니...'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절차와 비용에 대한 상담을 하고 빈소로 향했다.

남동생은 멀리 울진에서 내려오는 중이었고 남편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두 딸들을 픽업하러 KTX 역으로 마중 나갔다. 조문객을 받기 위한 음식들이 들어오고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들어오고 딸 회사에서 보내준 1회 용품들이 도착했다. 빈소 입구에 화환들이 세워졌다.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던 아버지의 사진으로 만든 영정사진을 받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는 너무나 편안하게,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인가. 무릎에 강아지를 안고 나를 바라보던 따뜻한 눈빛. 3년 전, 치매를 앓고 계셨지만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오후가 되자 친한 친구들이 한두 명씩 조문을 왔다.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와 준 고마운 친구들. 시간이 지나자 남편과 딸들이 도착했고 이어서 남동생 가족이 도착했다.

멀리서 온 몇몇 친지분들을 포함해서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가족장이니 오시지 말라고 회사 직원들에게 말하는 남편과 남동생. 나도 되도록 친구들에게 오지 말라고 말했지만 부고를 받자마자 달려온 친구들이 정말 고맙고 많은 위로가 됐다.


아버지를 자연장(잔디장)으로 모시기로 했다. 3년 전에 추모관에 안치했던 엄마의 유골함도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게 됐다. 두 분이서 나란히 바람 잘 통하는 높은 언덕에 위치한 잔디밭 아래서 편히 쉬실 수 있게 해 드렸다. 글자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차갑고 답답한 사기그릇이 아닌 토분에 담겨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부모님의 유골 가루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슬픔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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