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근무하는 날은 아버지를 두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의 무게가 종일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낮 근무자들이 퇴근을 한 후 한 시간 정도 더 일을 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난 수간호사가 말했다.
"오늘 마지막 날이지? 아버지는 자주 와서 돌봐드려. 나랑 업무적으로 안 맞는 부분이 있었지만 다른 건 없으니 그렇게 알고..."
지난 8개월 동안 나에게 했던 말 중 가장 인간적인 어투로 말한 것이었다.
진작에 그렇게 편한 말투를 사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순간 조금은 나에게 미안한 생각이 스치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앓던 이 빠지는 것처럼 시원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오늘이 마지막 근무하는 날이에요.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고요."라고 말하자 "그래? 어디로?"라고 무심히 물으셨다.
"서울로 가려고요. 병원에 들어가 적응 좀 되고 나면 아빠도 그쪽으로 옮기시게요."
"왜? 난 여기가 좋은데?"
"제가 날마다 아빠를 못 보잖아요."
"왜? 날마다 보러 오면 되지."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되잖아요. 그리고 서울에서 살 거라니까요."
"음... 알았다. 근데, 뭐 맛있는 거 없냐?"
"곧 저녁식사 시간인데 꼭 그러시더라. 잠깐만 기다리세요, 빵이랑 두유 가져올게요."
아버지를 오래 보고 있을 틈도 없었다. 정신없이 바쁜 일과가 이어졌고 두어 번 더 병실에 들어가 귀를 청소해 드리고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늘 물어봤던 말이지만 다시 한번 마음의 위안을 위해 물어봤다.
"불편한 거 있으시거나 다른 데로 옮기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냐?"
"혈당이 전보다는 많이 좋아지셨는데 아직은 정상보다 높아요. 더 좋아지시면 퇴원하실 수 있어요."
물론 새하얀 거짓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이 의외였다.
"응... 그런데 여기서 계속 살면 안 되냐?"
"당연히 되죠! 계속 계셔도 되고 다른 데로 옮기고 싶으시면 옮기셔도 되고요."
아버지는 병원비 걱정을 하셨다. 아버지의 노령연금과 국민연금(보험 설계사 시절 몇 년 동안 가입했던 국민연금)이 있으니 동생과 내가 10만 원씩만 더 보태면 된다고, 걱정 마시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날 아버지는 치매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매일 가져다 드렸던 과일 간식도 앞으로는 똑같이 드시기 힘드실 테지만 택배로 부쳐서 간식 시간에 조무사들이 챙겨드릴 수 있는,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과일은 자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걱정은 틀니였는데, 남에게 틀니를 내보이기 싫어하는 아버지를 누가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해서 관리를 해줄 것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잘 부탁한다고 여러 사람에게 말을 해두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다르지 않아서 밤에 아버지는 틀니를 빼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나는 "지금 빼서 소독하지 않으면 며칠 동안 저 쉬니까 누가 해줄 사람이 없어서 안 돼요."라고 몇 번이나 사정해서 아버지의 틀니를 뺄 수 있었다.
내가 병원을 그만둔다는 얘기는 이미 아버지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독한 틀니를 들고 아버지의 침상 머리맡으로 갔을 때 아버지는 코를 골며 잠들어 계셨다.
잠이 든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상태가 급격하게 나쁜 상태로 입원한 환자들, 중환자실에서 받아야 하는 위중한 상태의 환자들까지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다며 우리 병동으로 입원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주치의나 당직의를 불러 지시대로 모든 처치를 하고 입원절차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검사, 가져온 서류파일 정리며 전산에 입력, 환자가 집에서 가져온 온갖 종류의 약을 모양과 색깔, 약의 표면에 쓰여있는 문자를 검색해서 확인한 후 정리해서 파일에 입력하고, 본원에서 주치의가 처방한 약들과 함께 날짜별로 모든 약을 정리하는 등 일은 산더미다. 세상에 돈 벌기에 편한 일은 없다지만 간호사의 일은 정말 고됐다. 법적인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운영되는 병원의 시스템은 3교대에 대한 고려는 없다. 환자 수와 간호인력에 대한 비율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그 인원을 3으로 나누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간호사 1인이 3인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니 피로도는 가중되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서로에게 더욱 까칠하게 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전반적인 대한민국의 병원 상황이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은 간호 인력들과의 스트레스가 없었다. 끊임없이 내가 무능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지도록 나를 다그치던 수간호사는 없었다. 남에게 처치 하나라도 떠 넘기지 않고 아무나 나서서 금방 일을 처리해 놓았고, 상대적으로 덜 바쁜 주말 근무 때는 다른 근무 번의 일까지 대신 처리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여전히 환자 수는 많고 일손은 모자랐다.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태의 환자들을 보면서 제발 내 근무 시간에는 살아계셔 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야 했다. '환자를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들이 많았다.
너무나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을 볼 때마다, 인간적인 고통을 무시하고 차트와 처방전만 신경 쓰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환자의 상태가 위급해 보여서 직접 봐달라고 전화로 상태 설명을 해도 건성건성 지시나 내리고 귀찮다는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던 당직 의사들도 있었다. 주치의가 처방한 것을 자기는 바꾸기 싫다고, 자기가 봐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말하는 그 당직 의사에게 나는 "제발 와서 봐달라"라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환자를 보기 싫으면 왜 의사라는 직함으로 그 자리에 있는 거냐'라고, '주치의한테만 모든 책임을 지게 하고 밤 시간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간호사에게만 지켜보라고 할 거면 당직의는 왜 있는 거냐'라고... 정말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내가 잃을 것은 없었다. 병원을 그만둔다 한들 널린 것이 병원이고 지금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그만두고 자기 병원으로 나오라고 하는 곳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고 싶은 대로 소리를 지른다거나 감히(?) 의사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 같은 것이 통용되는 곳이 병동이다. 나 하나로 인해 의사와 우리 병동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원활한 업무처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모두가 힘들어지고 피해는 환자의 몫이 될 수도 있다.
병원은 어디나 간호사가 부족하다. 말로만 듣던 간호사 부족 현상을 직접 체험했다. 병동의 턱없는 일손 부족으로 힘든 업무에 지친 간호사들이 현장을 떠나고, 개선되지 않은 간호 현장에 새로운 인력이 들어왔다가 또 몇 달 만에 그만두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환자의 이름과 상태를 다 파악할 즈음이면 이직을 하고 만다. 더 나은 환경을 바라고 옮겨보지만 어느 병원이나 비슷하다. 그나마 간호사실의 인간적인 분위기가 좋으면 몇 년을 버텨낼 수도 있다.
서울의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병동의 치매 환자들을 대하면서 매 순간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걱정했다. 이틀을 연속으로 쉬는 날에는 KTX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 아버지가 드실만한 반찬을 만들고 과일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그릇에 담아 병원으로 갖다 드렸다. 전에 일했던 친분이 있으니 오후나 주말 근무자에게 부탁하여 면회를 해볼까 하는 기대도 있었으나 코로나 상황이 더 나빠져서 그것마저도 힘들었고 나중엔 병동별로 집단감염이 훑고 지나갔다.
친하게 지냈던 조무사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상태를 물어보기도 하고 병동으로 문의 전화를 하기도 했다.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없는 틀니 관리를 간병사들에게 재차 강조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동안은 내가 택배로 보낸 과일이나 과자와 두유 같은 간식도 드시는 것 같았는데 새 해가 되면서부터는 혈당이 잘 안 잡힌다고 간식 금지라고 했다. 하루 세 끼니를 깨죽만 드시는 아버지에게 다른 간식을 일절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던 서울의 요양병원에서는 입으로 음식을 못 삼키는 환자이거나 구토를 하는 경우가 아니면 간식을 금지시키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왜 그때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차피 먹는 약으로도 인슐린 주사로도 혈당이 잘 조절되지 않는다면, 먹는 것 말고는 아무런 낙이 없는 갇힌 신세의 아버지에게 그냥 드시고 싶은 것 다 드시게 해드리고 싶다고 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 후회스럽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던 나는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직도 수간호사가 나의 직속상관인 듯 위축되어 있었던 것인지, 괜히 심기를 건드려 아버지에게 오히려 더한 불이익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한 것인지...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보낼 수 없게 되자 미안함과 걱정, 불안, 그리움 등의 감정이 매일 증폭되었고 일하고 있는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의 이직으로 업무량이 과중되고 늘 누군가 또 그만두려는 불안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결국은 서울에서 사직을 결심했다. 앞으로 계속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 것인지 조차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적어도 아버지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다시 병원에서 일한다면 아버지를 모시고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사직 의사를 밝히고 한 달을 더 근무한 뒤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