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수간호사가 나에게 고함을 질렀을 때, 병동의 문을 확 잡아채면서 소리소리 질렀을 때,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는 병원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의 씨앗이 심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날은 한꺼번에 입원 환자 두 명이 나란히 들어왔다. 며칠 전 퇴원했었다가 다시 환자가 원해서 되돌아온 할머니 한 분과 요양원에서 생활하다가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하는 할머니였다. 내가 보호자와의 면담을 위해 내려가야 했으나 무슨 일인지 수간호사가 자신이 내려가겠다며 입원 Lab( 입원할 때 하는 기본적인 혈액검사)의 오더를 내라고 했다.
순간, '어? 오더는 내가 안 해봤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수간호사는 문을 닫고 내려가버린 상태였고 난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았다. 데스크의 선반에 붙여놓은 메모지에서 담당의사의 아이디와 비번을 찾아 진료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많은 처방코드 중 입원 Lab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수많은 검사항목을 일일이 다 입력할 수도 없고 묶음으로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텐데, 이것 저것 다 눌러보아도 찾고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조무사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날은 가장 오래된 능숙한 조무사가 비번이었고 다른 직원들은 전자 시스템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상상하며 긴장 속에서 몇 분 정도를 지체하고 있는데 갑자기 병동의 문이 확 열리며 수간호사의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여태 임상병리실로 오더를 안보내면 어떡하냐고? 그 사람들 퇴근 전에 검사해서 결과 나오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맞는 말이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지난 3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의사의 오더를 내가 낼 수도 있다는 것을(그것이 간호사의 일일수도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떻게 하는지 수간호사가 보여주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늘 수간호사는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모든 지시를 내렸고 간호기록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한 번 알려주고 모든 것을 내가 척척 알아서 해주길 원했다. 진료부의 오더는 확인용으로만 활용했을 뿐 내가 직접 의사의 아이디로 들어가서 오더를 대신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 일이 없었다. 수간호사 자신이 알아서 그동안 처리해 온 것을 난 몰랐던 것이다. 간호기록지도 항목별로 찾아서 입력하기가 어려웠지만 다시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잘 아는 조무사에게 한 번씩 슬쩍 물어보면서 처리하곤 했다. 그런 나를 못마땅해할 뿐, 시간을 따로 잡아서 제대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간호사는 병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아무도 이견을 내지 못하고 못 본 척 아니면 적극적으로 보조하는 일들도 많았는데 때로는 카리스마로, 때로는 인권에 위배되는 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규칙을 어기고 밤마다 샤워실에 들어가는 할머니가 있었다. 걸음걸이가 불안정해서 워커를 밀고 다니는데 멀쩡하게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는 환자였다. 샤워실에서 넘어지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허약한 노인들은 혼자서 샤워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할머니는 말을 듣지 않았고 수간호사와 언성이 높아지다가 악을 쓰며 싸우기도 자주 했다. 급기야는 그 할머니가 혼자 샤워를 하고 있을 땐 무조건 밖으로 끌어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옷을 벗고 있더라도 끌어내서 정신을 차리게 하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샤워실에서 큰 소리가 오가는 걸 듣고 달려갔더니, 옷을 벗은 채로 풀어헤친 백발의 긴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양쪽 팔뚝을 잡고 끌어내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의 거친 언쟁이 한창이었다. 할머니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쏟아져 나왔고 무조건 밖으로 나오라며 소리를 지르는 요양보호사들도 만만하지 않았다.
난 할머니에게 안전상의 이유로 혼자서 샤워하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다시 설명을 하며 나오시라고 했다. 할머니는 이번 한 번만 씻고 다음부터는 안 하겠다고 했다.
"할머니, 한 두 번이 아니시잖아요. 이번엔 봐드릴 수가 없어요. 지금 당장 나오셔야 하지만 잠깐 시간을 드릴게요. 물만 닦으시고 옷 입고 나오세요. 계속 안 나오겠다고 하면 여사님들이 그냥 끌어내도 전 뭐라고 말 못 해요."
결국 할머니는 내 말대로 순순히 물기만 닦고 옷을 입고 바로 나왔다. 그 상황을 밤근무 담당자에게 인계 시간에 말했고 다음날 아침에 수간호사는 같은 이야기를 밤근무자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오후에 나에게 인계 도중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백의의 천사고 나만 악녀 역할을 하라는 거지!"
수간호사의 눈 밖에 나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날이 있었다.
간호사실에서만 감돌던 수준의 긴장감이 아니라 온 병동의 환자들과 요양 보호사들까지 다 들어버린 상황이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동이 떠나가도록 소리소리 질러대는 수간호사의 비난의 화살을 다 맞으면서 한 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3개월이 지나자 병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계셨고 새로운 곳으로 옮길 경우 또 몇 달 동안 혼란을 겪을 것이기에 함부로 옮길 수가 없었다. 백내장 수술 날짜도 잡아놨으니 수술 후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계속 그곳에서 지내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간호사가 쏘아대는 포화를 다 맞으면서도 아버지를 생각하며 고개 숙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한편으론, '난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해. 아버지를 보러 와야지...'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아버지는 어쩌라고...' 그런 생각들이 가득 차서 뭐라고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의 소동이 간호부장의 귀에 들어갔는지 다음날 일하는 중에 간호부장이 병동으로 올라와서는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요즘,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
"제가 아직 일이 많이 서툴러서요... 수선생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봐요..."
"일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잘하게 되는 거지 뭐. 일 하다 보면 서로 안 맞는 부분도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화를 내더라도 제대로 설명을 먼저 해주고 나서..." 말을 하다가 목이 메었다. 정신없이 욕을 먹고 있을 땐 눈물이 안 났었는데 내 말을 들어주는 간호부장 앞에서는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서러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기가 참 조심스러워. 병동은 어쨌든 수선생님이 이끌고 가는 것이라서... 조금만 더 있다 보면 서로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수간호사의 태도가 나에게만 유독 쌀쌀맞았다는 것이다. 다른 직원의 실수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으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수를 하기도 전에 얼어붙게 다그쳤다.
늘 조무사에게 시키던 일을 갑자기 나한테 하라고 하면서 "누구랑 같이 가지 말고 혼자서 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아직도 그걸 몰라? 내가 하는 걸 옆에서 보기만 했어도 진작에 다 알았을걸!"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인데 언제 옆에서 하고 있는 일을 들여다보고 있냐는 말이다. 수간호사가 해야 할 일들도 많아 보였고, 행정적인 업무의 보조나 병원평가에 대비하기 위한 서류적인 준비들로 늘 바쁜 수간호사에게 일일이 내가 모르는 것들을 물어볼 타이밍을 찾기가 어려웠다. 잘 모르는 것은 저녁이나 주말근무 때 연습해 보거나 혹은 아주 드물게 다른 선배 간호사와 근무조가 되었을 때 물어보거나 경력이 오래된 조무사의 도움을 받았다.
간호사의 수가 적기 때문에 간호사 1명과 조무사들로 근무조가 편성이 됐고 내가 수간호사가 아닌 다른 간호사와 함께 일하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수간호사가 쉬는 평일 낮에 2명의 간호사가 함께 일하도록 배치되었다.
내가 기능적으로 빨리 배우거나 센스가 있는 간호사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들과 소통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려고 했다.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문제점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중에 다른 병원에서 일하면서 보니 환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부당한 처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를 그 수간호사의 감독하에 두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지만 나의 형편으로는 입원비가 3배 이상 차이가 나는 서울의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셔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적응 문제도 생각해야 했고 내가 언제까지 병원에서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계속 드는 상황에서 아버지를 이리저리 병원 순회를 시킬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