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버지의 건강 상태에 이상 신호가 왔다. 코로나19 확진 소식을 들은 지 3일 만이다.
평소 고구마와 돈가스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로제 돈가스 정식을 포장 주문하여 찐 고구마와 함께 가져갔다. 병동에 전화를 걸어 음식을 가져왔다고 말하자 아버지가 갑자기 구토와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서 산소 포화도는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의식은 정상이라고 했다. 병동에서는 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의식이 있고 체온, 혈압 등 바이탈 사인이 정상이라고 하니 조금은 안심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병동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병원 전체에 코로나가 퍼지지만 않았어도 부탁해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설 연휴 때는 외부음식 반입도 일체 안된다고 하여 가져 간 음식도 못 드리고 되가져 올 만큼 민감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음식 반입이 다시 허용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저녁에 상태 봐서 괜찮으면 드시도록 음식은 전달했고 아버지와 통화했다.
"아빠, 아프세요?" "아니~"
"숨쉬기 힘들어요?" "아니, 괜찮다."
"불편한 데 있으면 참지 말고 꼭 간호사 불러요, 네?" "으응..."
내 말에 모순을 느끼면서도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다니 한심하다. 병상에 누워있는 많은 환자들이 자신이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표현하지 못한다. 그저 숨을 헐떡이거나 열이 나서 끙끙 앓고 있거나 토사물이 입안에 고인 채 누워 있기도 한다. 아버지도 그냥 그렇게 누워 계시는 것을 간호사가 근무교대 후 라운딩을 돌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구토 때문에 잠시 힘드신 걸 거야.'라고 생각했다가도 '코로나 때문에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고 불안했다.
저녁에 다시 병동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깨죽도 못 드시겠다고 해서 설탕을 타서 절반쯤 드렸는데 드시고는 또 구토를 했다고, 산소마스크를 벗어버려서 산소 포화도가 뚝 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산소 농도를 올리고 나아지기는 했지만 당직의 보고를 했을 때 기도삽관 얘기도 나왔다고 했다. 아아... 탄식이 절로 나왔다. 눈물이 났다.
이건 아닌데... "샘, 인투는 안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린다, 마치 나의 아버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 같다. 나의 선택에 따라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치매와 당뇨 말고는 딱히 문제가 될만한 병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 왔다니, 기도삽관이라니?
지난 1년 동안 환자들을 보면서 수도 없이 자문해왔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라고...
내가 원한다고 원하는 모습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이고 현실이다. "기저귀 찰 정도면 그냥 혀 깨물고 죽어버리겠다!"라고 냉정하게 말하던 친정 엄마는 와상으로 5년 동안 기저귀를 하고 요양보호사의 간병을 받았다.
응급실에서 갑자기 호흡곤란이 왔던 엄마의 기도삽관을 내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는 사실상 그것이 당시의 엄마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강조했다. 집에서 5년 동안 지내면서 서서히 엄마의 몸은 망가져가고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며칠 동안 구토를 하며 잘 못 드셔서 기진맥진한 엄마에게 영양제라고 놔드리고 싶어서 모시고 간 응급실에서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난 오열했다.
심근경색이 있으며 당장 스텐트를 삽입해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술 도중에 잘 못 될 수도 있으며 성공한다고 해도 급한 불만 끄는 격이고 이미 심근경색이 왔기 때문에 오래 사시지는 못 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신부전도 심해서 남은 평생은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잠깐 문밖 복도에서 남동생과 통화를 하는데 동생은 울면서, "엄마를 보고 싶어. 당장 내려갈 테니 제발 엄마가 살아있게 해 줘."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달리 없는 것 같았다. 다시 응급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의사는 "인투!"를 외치고 있는 중이었고 순식간에 일사 불난 한 의료진들의 움직임과 엄마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고 그 광경을 안 볼 수는 있어도 들리는 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고 내 목에서 끄윽끄윽 올라오는 울음소리도 멈출 수가 없었다. 3년 전의 일이다.
일요일 아침.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의 상태가 언제 어떻게 나빠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의식이 있는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경우나 임종이 다가왔을 때는 제한적으로 가족의 면회가 허용된다. 코로나 환자들이 있는 병실이지만 들어갔다.
아버지가 의식이 있고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있을 때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도삽관을 하지 않고 '에어보'를 통해 산소를 공급받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내가 "아버지! 아빠?" 하고 부르자 눈을 번쩍 뜨시고는 "물, 물 좀..." 하고 말했다. 금식 상태라 입으로 물을 드실 수는 없고 거즈에 물을 적셔 입을 닦아드리기만 했다. "아빠, 아파요?"라고 묻자 고개를 젓더니, "그럼, 숨 차?"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신다. 가슴이 크게 들썩거리고 입은 벌린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버지... 심전도 모니터와 수액, 영양제 등을 달고 있었다. 주말 당직 의사인 병원장이 병실에 들어와 전날 저녁부터의 아버지 상태를 보고받더니 말한다, "흡인성 폐렴 같아요, 아마 구토했던 게 기도로 흡인됐을 거예요." 치매로 입원한 지 14개월 동안 한 번도 구토를 한 일은 없었다. 최근 두 달 동안 혈당조절 때문에 간식도 금지돼서 음식이라고는 깨죽만 드셨던 아버지. 갑작스러운 구토를 일으킨 환자들이 몇몇 더 있었다고 했다. 모두 코로나19 확진자들이었다.
"아빠, 폐렴이래. 항생제 주사 맞고 영양제 맞고 그러면 곧 나을 거예요. 나으면 나랑 드라이브도 가고 돈가스도 먹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이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오로지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명상 호흡을 하는 것처럼...
나는 간절히 바랬다. 아버지의 증상들이 빨리 좋아지기를, 폐렴 치료만 일주일 정도 하면 모든 게 이전처럼 되돌아가기를. 코로나 확산이 좀 더 누그러지면 외진을 나가고 외출도 해야지. 그전에 드시고 싶은 것 자주 갖다 드려야지...
월요일 낮. 아버지를 중환자실로 내렸다는 수간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혈당이 50 이하로 떨어졌다고 했다. 고혈당과 저혈당을 오가며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다. 나의 연락을 받고 남동생이 묻는다, "중환자실에서 다시 일반 병실로 올라올 수도 있어?"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르지. 인공호흡기를 달았다가도 호전돼서 자기 호흡을 하고 좋아져서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 그런데 50~ 60대 비교적 젊은 환자들의 경우가 그렇더라. 아버지는 지금 스스로 호흡하고 있지만 폐에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 건지, 코로나로 인한 후유증 같은데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 상태가 악화되더라도 기도삽관은 하지 않겠다는 것에는 동생도 동의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나도, 나의 남편도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삶을 연장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족들에게 늘 얘기해왔고 모두가 동의하는 듯했다. 언젠가 딸들은 내게 물었다. "엄마는 우리가 갑자기 다치거나 아파서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한다면 거부할 수 있겠어?"라고. "아닐 거야, 힘들겠지. 그냥 그렇게라도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 싶겠지. 하지만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면 빨리 보내주는 것이 환자를 위하는 거야. 대부분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그러니까 내가 그런 경우에 처하면 제발 나를 위해서 편히 보내줘야 돼, 알았지?"
아버지 옆에 있고 싶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요양병원은 개인 간병이 가능한 곳이 아니다. 아버지가 활동이 자유로울 때는 옆에 누가 있어줄 필요가 없었기도 하다. 아버지의 상태가 위중해졌지만 코로나 확진자라서 다른 병원에서는 받아주지도 않고 코로나 전담 병원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서울에서 근무했던 병원은 개인 간병사를 두거나 가족이 개인 간병을 할 수 있었다. 환자들 곁에서 24시간 생활해야 하는 가족이 너무나 힘들어 보였지만 그들이 부럽기도 했었다.
월요일 오후 내내 살아계시는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