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아, 오늘은 너의 집에 다녀왔어. 환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었거든, 투투도 보고 싶었고.
환이에게 며칠 전에 톡을 보냈어, 이모가 금요일에 갈 거니까 뭐 먹고 싶은지 알려달라고...
미역줄기 볶음과 콩나물을 말하더구나. 갈비찜이라든지 뭔가 손이 많이 가는 거창한 요리를 말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문득, 언젠가 뭐 먹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네가 콩나물이라고 대답했던 것이 생각나더라.
아들이 좋아해서 네가 콩나물을 해달라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또 어쩌면 네가 좋아했던 음식이어서 환이가 그걸 해달라고 말한 것인가 싶기도 하고...
미역줄기와 콩나물, 쇠고기 장조림과 어묵볶음, 고추장양념에 볶은 멸치를 가지고 갔어. 어제 오후부터 만들면서 간을 봤던 터라 낮에는 같은 반찬을 먹고 싶지 않아서 튀김과 김밥을 샀단다.
환이와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염려하던 것과는 다르게 예전처럼 편안해 보이더구나.
집안도 정돈이 잘 되어 있더라. 도우미 아주머니는 여전히 주 1회 토요일에만 온다는데 말이지. 참, 거실의 소파와 러닝머신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더라. 정돈된 집안을 보니 제부와 환이의 마음이 안정되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겉만 보고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고맙고, 삶의 의욕을 잃을 정도로 슬픔에 깊이 빠져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던 터라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든 거야. 마음에 병이 깊이 들면 억지로라도 괜찮은 듯 꾸밀 수는 없을 테니까...
의식이 있는 동안 환이를 많이 걱정했던 네가 이제는 한시름 놓고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 다들 제 몫의 삶을 충실히 잘 살아갈 거야. 넌 걱정 말고 응원만 해주렴.
투투도 말끔하게 미용을 했고 표정이 밝아져 있었단다. 아마 한 달 동안 환이가 매일 산책을 시켜주고 늘 집안에 있어주어서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이겠지. 한 달 전에 보았던, 덥수룩한 털에 흐릿한 눈빛에 생기하나 없던 모습이 아니고, 예전의 건강한 투투가 되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네가 누워서만 지내게 되고 너의 입원생활이 반복되는 동안 투투는 너무나 우울해 보였고 저러다 투투도 곧 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했었지. 유난히 작은 몸집의 강아지라 체질적으로 약해서 수명이 길지 않을 거라며 늘 걱정했잖니. 지난 몇 달 동안의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와 사랑을 제대로 못 받은 탓에 잔뜩 의기소침해 있던 녀석이 오늘은 명랑해 보여서 기분이 좋더라.
언제부터인가 네가 카톡 프로필의 투투 사진 아래에 "나의 투투"라는 메시지를 띄워놓았고 그 네 글자를 볼 때마다 난 마음이 아팠단다. 지금도 그래. '갑자기 그 문구로 바꾸었을 때 너는 네가 떠난 후의 투투를 염려한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거든.
제부가 너의 생일날 네 품에 안겨준 주먹만 한 강아지가 너무 예뻐서 난 수시로 너의 집에 투투를 보러 갔고 너도 수시로 투투를 데리고 나의 집에 와서 놀았었지. 예뻐하면서도 공간의 분리를 원칙으로 했던 너의 집에서와 달리 우리 집에 오면 내가 품에 끼고 이불에서 뒹굴며 놀고 자고 해서인지 나를 더 좋아해서 우리 집 현관에서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투투. 너의 집에서 내가 나올 때면 현관문 앞에 한참을 앉아 구슬프게 하울링을 하던 투투를 보고 혹시나 이모한테 뺏길까 봐 노심초사하던 꼬맹이 조카들이 벌써 둘 다 수험생이 되어 있네. 아, 또 기어이 눈물이 나고야 마는구나. 애들 대학 가는 거 보고 가지, 뭐가 그리 급하다고 훌쩍 떠나버린 거니...
나를 너무 좋아해서 네가 나에게 키우는 게 어떠냐고 했었던, 나의 투투가 될 뻔했던 너의 투투.
그 작은 강아지를 너무나 사랑해서, 강아지가 슬퍼하는 것에마음 아파서, 나에게 주려고 했던 너의 깊은 사랑을 투투는 알까?
그렇다고 어린 조카들이 얼마나 이뻐하는 줄 아는데 (물론 치다꺼리는 다 엄마의 몫이지만 말이야) 이모가 그 강아지를 데려와버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투투를 두고 나오며 간절한 눈빛과 하울링 소리에 나도 울고 그랬었는데, 결국엔 내가 다른 강아지를 입양하자 나를 포기하고 너에게로 향하던 그 짠한 어린것이 벌써 여덟 살이 되었구나.
그 작은 생명체가 너와 나에게로 와서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지. 우리 둘 다 애들 키울 때도 그랬듯이 강아지한테도 무조건적인 사랑만 베풀고 훈육을 제대로 안 해서 상전 모시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행복했어.
이젠 내가 안녕이라고 말하고 문을 나서도 슬퍼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날 보면 좋아서 깡충거리는 투투.
네가 없는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는 환이에게 투투의 존재가 위로가 될 것이라 생각해.
'나의 투투'라고 쓴 너의 프로필 맨트가 슬픈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투투 앞에서는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 우리 집에서는 쿠키 앞에서 '이모'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으려고 애쓴단다. 투투는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지만 속으로는 엄마가 그리울 거야. 쿠키는 이모가 오는 줄 알고 창밖을 내다보고 흥분해서 짖으며 엉덩이와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지.
그런 강아지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나와 딸들은 늘 울어버리게 되니 말할 때 조심하는 수밖에...
오늘 투투를 데리고 너네 집 단지 내의 정원을 걷다가 또 그날이 생각났어. 네가 벤치에 휴대폰을 놓고 깜박 잊고 집으로 들어갔던 날 말이야. 그래서 삼촌이 휴대폰지갑을 사주었던 일과 그날이 너와 함께 걸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어.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등에 업고서 천천히 잔디 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넌 힘들다며 앉아서 쉬자고 했었지. 그날은 맑은 하늘에 가을 햇볕이 따뜻했었는데...
오늘은 5월의 끝자락에 있지만 구름 낀 하늘 덕분에 덥지는 않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단다.
나 홀로 투투와 산책 중,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투투 때문에 사진의 각도가 제 멋대로다.
은영아, 너와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엔 서럽게 눈물이 나.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
'넌 좋겠다, 너는 네가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 아파할 일은 겪지 않았으니...'
지영이도 그러더구나, 주위에 사람들 다 떠난 뒤까지 혼자 오래 살까 봐 너무 겁난다고...
둘 다 얼마나 한심하고 바보 같은 억지소리인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며 울먹였단다.
자식들을 놔두고, 부서질 듯 여리고 작은 투투를 두고, 너를 한없이 사랑하는 남편을 남겨 두고, 연로한 엄마를 뒤로 하고, 먼저 떠나야 하는 네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처절하게 슬프고 억울하고 외롭고 두려웠을지, 감히 짐작도 못 하겠는데, 그저 너를 잃은 나의 슬픔만 크게 보고 내가 슬프다고 그런 억지를 부리다니...
하지만 그런 넋두리라도 하지 않으면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으니 철없는 언니들을 용서해 주렴.
우린 마음껏 너를 생각하며 너에 대해 이야기하고, 슬픔을 감추려 하지 않으며, 울고 싶을 때는 울면서 이 시기를 지나갈 거야. 그리고 또 너의 산소에 가서는 너의 사진을 보고 웃으며 얘기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