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주인공인 삶
중학생 엄마가 어느덧 순진한 처녀가 되었다. 누군가 엄마 지인을 통해 엄마를 소개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견식이 누나인데 알면 혼쭐난다고 하자 두 말도 못 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견식 외삼촌이 엄마를 지킨 건지 엄마가 남동생 때문에 연애할 기회를 놓친 건지 암튼 그랬다.
엄마가 젊은 시절에는 양반 가문을 귀하게 생각하는 때였다. 엄마의 배필로 안동 권씨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와 혼사말이 오가게 되었다. 공군사관학교 생도였던 아버지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인사하러 오고 결혼을 약속했다. 엄마는 문틈으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외할머니가 왜 그런 가난한 집에 딸을 시집보내느냐고 외할아버지께 뭐라 하니 외할아버지가 ' 군인 월급 가지고 둘이 잘 살면 되지 않겠냐' 하고 할머니를 달랬다. 아버지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된 해에 백석정 맞은편 빨간 지붕 집에서 드디어 혼례를 올렸다. 1958년의 일이다. 군인과 새색시가 지나가면 '홀쭉이와 뚱뚱이 봐라'하고 수군대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그렇게 엄마는 마른 체구였고 아버지는 풍채가 좋았다.
엄마는 결혼식을 올린 날짜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대전 시댁에 들어간 날짜는 결혼한 그 해 4월 26일로 기억한다. 시댁에 들어간 날에야 정말 지독히도 가난한 집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시부모님과 시동생들 밥 하는 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아궁이 불을 잘 붙이지 못한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어 고구마 잎으로 된장국을 끓이면 쓴맛이 나는데도 모두 매끼마다 밥그릇 수북이 고봉밥을 먹었다. 시동생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에서 물을 길어 놓으면 그 물을 아껴 쓰느라 애를 썼다. 아버지의 큰 아버지 댁에서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큰 아버지는 점잖은 분이셨다. 인사를 가면 '밥은 잘 먹냐' 하며 따뜻한 말로 엄마를 맞아 주었다. 한 번은 그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는데 엄마가 밥 몇 숟가락을 뜨고 나니 밥그릇 밑에 시커먼 행주가 보였다. 큰 아버지댁 며느리가 엄마에게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행주를 꺼내 들면 사촌 형님이 난처한 상황이 될까 봐 조용히 밥으로 행주를 덮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대단한 시집살이는 천안으로 발령을 받고서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친할머니는 4남 3녀를 낳고 세상을 떠나셨고 그 이후 할아버지는 새장가를 드신 상태였다. 아버지는 배가 고파도 참고 모은 군인 월급으로 새 할머니에게 동생들 잘 보살펴 달라고 화장품 등을 사드리곤 했다. 그러나 새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2남 2녀를 두었기 때문에 아버지 동생들은 그저 큰오빠, 큰형인 아버지에게 의지하려 했다. 외할아버지가 말한 '군인 월급으로 둘이 잘 살면 된다'는 것은 꿈같은 현실이 되었다. 철없는 동생들은 큰오빠에게 해달라는 것이 많았다. 아버지는 매달 월급날이 되면 가불하고 얼마 남지 않은 가벼운 월급봉투를 방에 슬쩍 놓고 출근했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아버지의 동생들은 엄마 차지가 되었다. 옆집 사람들이 시동생들의 분별없는 행동에 혀를 찰 정도였으니 엄마는 그 시간을 참아내며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엄마는 동생들 뒤치다꺼리에 시달리는 아버지가 안쓰러워 한 번도 시동생들을 흉보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엄마는 기찻길을 내려다보며 이 괴로운 삶을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만약 목숨을 끊는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욕을 보실까 싶어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기찻길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눈물짓고 있었을 엄마를 생각하면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고 마음이 저려온다. 엄마 젊은 시절의 삶은 전쟁 때문에, 가난 때문에, 장남과의 결혼 때문에 참으로 고되고 견디기 힘들었다. 주인공 역할을 마다하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