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o May 15. 2024

백마에서 : 동물원 5-1, 1993

음악은 힘이 세다

출근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서며 이어폰을 꽂았다.

- 덜컹,,, 덜컹,,, 덜컹덜컹덜컹,,,

응? 기차소리? 왜 이런 소리가 나지?

내가 선곡하지 않은 플레이리스트가 주술처럼 플레이한 오늘의 노래.

아...! 백마에서구나!


박기영이 고운 미성으로 읊조리는 '백마에서'가 흘러나온다.

음악은 곧 나를 1993년으로 데려갔다.

"동물원 5-1"이라 새겨진 LP의 표지도 선명하게 떠올랐고,

박기영의 목소리는 덜컹덜컹 경의선 기차에 나를 태우고는, 쏜살같이 30년 전으로 이동했다.

(아... 이게 벌써 30년 전이라니....라는 탄식과 함께)


음악은 힘이 세다.

순식간에 우리를 그 시절 그때로 데려다주는 것에 음악만큼 강하고 빠른 것이 없다.

그 노래를 듣던 시절에 우리 집 화병에 백합이 꽂혀있었던가.

이 노래는, 나에게 백합향까지 실어온다.


학교 앞 자취방에 둘러앉아 함께 LP를 듣던 낭만의 시절,

무리 지어 다니던 선배들의 얼굴들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들은 모두 잘 살고 있으려나?

궁금해진 그들의 안부와 함께 마음이 몽글해진다.


여유, 낭만, 캠퍼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미안해지는 그 단어들이 우리에겐 있었다.

치기 어린 방황조차 용서가 되던 라떼의 청춘.

매듭과 단락이 지어있지 않은 채 푸르기만 한 시간이 버겁기도 했지만,

그때에만 허용되는 방종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 또한 그 시절의 나는 알고 있었다.


기왕 박기영의 노래가 타임슬립으로 나를 1993으로 데려왔으니,

마치 티비쇼에서 그러하듯, 그 시절의 나에게 편지를 남겨본다.




" 스물한 살 선오야, (큼큼) 잘 지내고 있어?

  혹시 오늘 아침에도 거울에 비춘 네 모습이 너무 우울해 보여서 걱정했니?

  뭘 하며 살고 싶은지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방황하던 네 마음, 나 잘 알고 있어.


  네가 보내는 대학생활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런 고민 많이 할 텐데, (그런 고민하느라 혼자서 구석진 캠퍼스를 배회하던 너를 내가 알지)

  내가 알아.

  네가 보낸 그 시간이 살면서 너한테 분명 의미가 있다는 거.

  너는 거기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도 만나고,

  그 시간들 덕에 결국 한 걸음씩 너를 찾는 연습을 하게 돼.

  그래서 지금 니가 매일 불안해하는 그 걱정들보다 훨씬 나은 미래를 살게 될 거야.


  어떻게 나은 미래냐고?

  넌 점점 더 쉽게 행복해하고, 꽤나 감사할 일이 많은 미래의 선오로 살게 될 거니까.

  그러니까, 선오야.

  조금 덜 심각하게 그 시절을 기쁘게 누렸으면 좋겠어.

  니가 무겁거나 심각하지 않게 지내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그때도 지금도 넌 충분히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거. 말해주고 싶구나.

  훗날의 너를 믿고 너무 우울해하지 말길.

  훗날의 너는 지금 내가 증명하니까.

  그러니, 젊은 선오야.

  조금 더 자신 있게, 너의 청춘을 가볍고 푸르게 보내도 돼.


  아, 한 가지 당부할 게 있는데, LP판들 모은 거 말이야.

  그거 나중에 가치가 폭등하는 때가 오니까, 바보같이 처분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

   

  언제나 응원해. 너의 삶을. "

   





https://youtu.be/sDZHvcMNMXA?si=4I0Hv-WRlmxKkHpv


백마에서 - 05:38


첫눈 내리던 지난 겨울날 우린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싶어서

흔들거리는 교외선에 몸을 싣고서 백마라는 작은 마을에 내렸지

아무도 없는 작은 주점엔 수많은 촛불들이 우리를 반겼고

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품에 안겨서 그렇게 한 참을 있었지

이제 우리는 멀리 헤어져 다시 만날 수는 없어도 지는 노을을 받아 맑게 빛나던 너의 눈은 잊을 수 없어

햇살에 눈이 녹듯 그렇게 사랑은 녹아 사라져 가도 그 소중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은 너도 잊을 순 없을 거야

눈 덮인 논길을 따라서 우린 한참을 걸었지 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품에 안겨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지 이제 우리는 멀리 헤어져 다시 만날 수는 없어도 지는 노을을 받아 맑게 빛나던 너의 눈은 잊을 수 없어

햇살에 눈이 녹듯 그렇게 사랑은 녹아 사라져 가도 그 소중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은 너도 잊을 순 없을 거야

오늘도 소리 없이 첫눈이 내려 난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싶어서 흔들거리는 교외선에 몸을 싣고서

백마라는 작은 마을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