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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o May 17. 2024

이승철과 변진섭의 그녀들, 1989

라떼도 덕후의 소녀들은 있었다네

덕후, 성덕, 덕질과 같은 표현을 쓰기 시작한 건 요즘이겠지만

라떼도 역시 덕후들은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소녀로 살던 라떼 이전에도 덕질의 형태는 여전히 있었겠지)


내가 조용히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만 하는 대중가요의 수동적 수혜자였다면,

나의 친구인 그녀들은 이미 적극적인 덕질을 하고 있어 적잖이 놀랐던 기억.

좀 더 깊이 친해지고 난 후에야 알게 되는 덕후의 커밍아웃은 그때도 같았던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승철의 그녀.


적막이 흐르던 고2 아침 자습시간이었나.

앞에 앉아있던 깐돌이 그녀가

(미안, 이름은 이미 잊어버리고 너의 별명만 기억나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대성통곡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단체로 깜짝 놀랐지.

뭐야,, 집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 건가, 걱정하는 표정들이 이어지고.

왜 그러는지 물어도 흐느낌을 멈추지 못하던 그 아이가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듣던 이어폰을 내 귀에 들려주며 한 말.

- 오빠가(승철이 오빠가) 이 노래를 불렀어. 흑흑


그녀를 눈물 범벅으로 울려버린 노래는, 그 유명한 이승철의 불후의 명곡. "희야"였다.

노래야 물론 명곡이지.

나한테는 오빠는 아니지만, 나도 물론 좋아하는 노래고.

근데 이 노래가 왜 널 그렇게 통곡하게 만드는 건지는, 그때도 지금도 난 잘... ^^

미안, 내가 공감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요즘에야 알고 있지 뭐니.


한번 더 미안하지만, 그때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

- 뭐야, 니 이름에는 '희'도 안 들어가면서, 왜 '희야'를 듣고 우는 거야?

(근데 이승철 커버 이미지 찾아보다가 나 웃어버렸네. 진짜 젊을 때는 박명수랑 너무 닮았구나. ㅋㅋ

앗, 또 미안;; )

큼큼.. 지금 생각하니, 친구는 이승철의 앨범 맨 마지막 트랙에 있던 '희야'를 아마 그 순간 처음으로 듣고

감격했던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평소 순둥한 성격에, 게다가 그녀는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까지 왔기 때문에

범생이처럼 공부만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너는 그랬구나.

승철 오빠의 노래가 위안이고, 승철이 오빠가 희망이고 버팀목이었나 보다.

노래의 힘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참 세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변진섭의 그녀.


그녀 또한 공부 잘하는 범생이.

나에겐 도시락을 자주 양보해 주던 착한 친구. ㅋㅋ

특별한 간식이 있으면 나 주려고 챙겨 와 주던 고마운 친구.


1989년 변진섭은 그의 두 번째 앨범 <너에게로 또다시>의 모든 수록곡이 굉장한 히트를 치며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를 하는 등, 말 그대로 대형가수였다.

그러니 변진섭 노래는 그 시절 모두가 좋아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는 다들 그냥 나처럼 좋아할 줄 알았지. 열심히 듣고 따라 부르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애라 자주 체했었나.

그날도 저녁도 먹지 않았으면서 체기가 있다며, 불편한 의자를 여러 개 연결해서 그 위에 누워있던 친구가,

- 나 진섭이 오빠 집에도 가봤어.

라는 폭탄 발언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해서 나만 혼자 까무러치게 놀란 기억.


콘서트란 콘서트를 전국으로 따라다니는 건 물론이고,

적극적인 여고생 팬으로 오빠가 이름도 얼굴도 알아보는 사이라는 고백.

진섭이 오빠 집에 가봤다는 표현은 아마도, 스타가 사는 집 앞까지도 가봤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변진섭을 오빠로 두고 살고 있던 친구는, 오빠가 동력이고 화두였을 것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에도 오빠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녀에게 숨어있던 적극적 면모는 놀랍고 대단해보였다.


물론, 그 시절 나도 '들국화' 콘서트를 예매했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나에겐 '들국화'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최고며 짱이었으니까. ^^

라이브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와 친구들은 큰 맘먹고 들국화 대전 콘서트를 예매했고,

비 때문이었던가? 그 콘서트는 결국 취소되어 아쉬운 기억만 남았다.


시간은 25년을 훌쩍 지나, 2015년.

우리 집안에서도 덕질이라는 게 시작되었다.

어느새 소녀로 자라난 나의 딸들이 덕질을 시작했다.

거침없이 서울로 콘서트를 다녀오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털어 앨범을 사모았다.

응원봉과 굿즈라는 것들이 쌓여갔다.

내 딸들에게도 자신의 취향이 생기고, 자신만의 무언가들이 생기기 시작했나 보았다.

좀 작작하라는 잔소리와는 달리,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응원도 있었다는 걸 너희는 모르지.




열정이 넘쳐 겉으로 폭발하여 표현되는 사람이 있고,

자신 안에 담아두고 물결처럼 다스리고 사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노래가 때론 우리 안의 잔잔한 열정을 겉으로 촉발시킬 수 있다는 건 음악의 축복이다.

역시나 음악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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