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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16. 2023

호두 수확

산사에서 180일


호두수확



따스한 아침 햇살이 나를 나른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쑥뜸이 끝나고 숲으로 들어갔다. 비탈진 오솔길 위로 빨간 단풍나무 잎이 몸을 흔들며 내려앉았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대지로 내려앉는 나뭇잎의 아름다운 순응을 바라보며 뿌린 내린 나무처럼 잠시 서 있었다. 


산길 초입에 볼품없이 보이는 고욤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아무도 고욤나무 열매를 따지는 않는다. 시골마을에는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 두 그루씩 있다. 그러나 감이 익어도 딸 수가 없다. 시골마을에는 노인들만 살고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먹을 것이 풍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야생 고욤나무 열매는 새의 먹이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일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고욤나무를 칡덩굴이 감고 있다는 것이다. 고욤나무는 보이지 않고 나무를 칭칭 감고 쑥쑥 자라고 있는 칡덩굴만 보였다. 일부 가지는 벌써 고사해서 잎 없는 시커먼 가지만 남았다. 칡은 감을 곳이 있다면 어느 순간 순을 쭉 뻗어 감아 올라간다. 고욤나무를 살리려면 칡뿌리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에 인간이 누구의 편을 든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개입하게 되고 결국 자연은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서 아버지와 자녀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여우가 토끼를 사냥하려고 준비하는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는데 작은 딸아이가 아버지에게 토끼를 살려 주자고 말했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그러면 오늘 밤에 여우가족의 작은 새끼가 배가 고파 울지도 몰라"

자연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두어야 한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이 자연을 거스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솦속에서는 매 순간 치열한 삶의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사자가 영양을 사냥한다고 사자를 좇아내거나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칡과 등나무는 둘 다 다른 나무를 감싸 덮으면서 결국 나무를 고사시켜 버린다. 이런 나무들은 다른 나무를 이용하지 않고는 햇빛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등나무는 싹을 틔우면서부터 높이 자란 이웃 나무에 다가가 허락도 없이 덩굴로 우선 몸 전체를 휘감으며 위로 올라간다. 해를 거듭할수록 감아둔 덩굴로 어미 나무의 몸체를 옥죄기 시작한다. 등나무의 옥죄임은 영양분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셈이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등나무와 달리 칡은 숲에 가야 볼 수 있다. 칡은 양지바른 숲의 가장자리에서 나무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꼭대기로 올라간다. 칡은 옥죄기가 아니지만 자신은 햇빛을 받지만 상대 나무는 결국 고사된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집에 자신의 알을 낳고 사라진다. 그러면 그 새는 자신의 알처럼 보살펴 부화시키고 먹이를 주면서 정성을 다해 키운다. 그러나 어미새는 새끼가 자기 보다 몸집이 더 커져도 자신의 둥지에 있는 새끼새가 뻐꾸기새끼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새끼를 먹이고 보호하는데 온 정성을 다해 키울 뿐이다. 다 자란 새끼는 뻐꾸기가 되어 숲 속으로 사라진다. 어미새는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뻐꾸기는 또다시 새로운 짝을 찾고 암컷은 또 다른 새의 집을 찾아 몰래 알을 낳고 사라진다. 

숲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신비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적은 매 순간 일어난다. 다만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



산길을 벗어나 산사로 돌아오는 길에 호두나무 아래에서 긴 장대를 휘두르고 있는 김처사를 발견했다. 어제 김처사와  나눈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은 어제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호두밭을 들여다보았다. 바싹 말라 오그라 든 호두나무 잎은 이미 떨어졌고 호두열매만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오늘 아침나절에 마당에서 마주친 김처사에게 물었다.

"호두는 언제 땁니까?  수확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김처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맞습니다. 이제 따야지요. 오늘부터 슬슬 따 볼까 합니다."

나는 김처사에게 

"호두 따러 나갈 때 알려주십시오."

일손을 보태겠다고 했다. 그러자 김처사는

"힘들텐데요. 보기보다 힘들어요. 장대로 때려야 하고 주워 담을 때는 허리도 아프고......"

그래도 나는 해 보겠다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호두밭으로 내려갔다. 키보다 높은 가지에 달린 호두는 장대로 쳐서 떨어뜨렸다. 장대로 칠 때마다 '후드득' 소리를 내며 호두가 떨어졌다. 김처사는 장대로 모두 쳐서 떨어뜨려 놓고 주워 담자고 했다. 나는 작은 대나무 막대로 중간 정도 높이에 있는 호두를 쳐서 떨어뜨렸다. 이미 벌어져 호두알이 빠진 것이 있고 손으로 껍질을 깔 수 있을 정도로 벌어져 있는 호두열매가 있다. 대부분은 호두알은 보이지 않고 아직 단단한 껍질이 감싸고 있었다. 

호두나무 밭 위로 뒹굴며 나가떨어진 호두를 주워 담으면서 김처사는

"선생님! 일반 목장갑을 끼고 하면 호두물이 손에 호두껍질 물이 배어서 물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는 목장갑을 벗어 보았다. 정말로 검지와 엄지 손가락 끝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김처사가 고무장갑을 차에서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우리는 함께 웃으며 즐겁게 일을 했다. 



호두로 채워진 바구니들을 트럭에 옮겨 실었다. 껍질 채 있는 호두는 며칠 동안 밖에 두면 겉껍질이 썩어서 쉽게 깔 수 있다고 했다. 껍질이 벗겨진 호두는 큰 양동이에 담아서 씻었다. 계곡으로 연결된 호스에서 맑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호두는 두 겹의 껍질을 가지고 있다. 겉껍질 안에는 단단한 껍질이 호두를 또 한 번 깜 싸고 있다. 식물들도 자신을 보호하여 자신의 종을 널리 퍼트리는 쪽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식물학자들의 말이 맞는 같다.


호두를 씻으며 김처사는 

"호두는 선생님처럼 기름진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식품입니다. 호두에는 불포화지방으로 알려진 오메가 3 지방이 많기 때문이지요"

"특히 암을 가진 사람은 좋은 지방과 단백질을 제대로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호두는 슈퍼푸드로 그 효능도 잘 알려져 있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호두와 각종 견과류를 꼭 챙겨 먹고 있다. 특히 호두는 사람의 뇌와 같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뇌건강식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처사는 잠시 일손을 놓고 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호두는 피부노화방지에도 좋은 식품입니다. 또 동맥경화 예방에도 좋지요."


김처사의 호두 사랑 이야기가 끝나자 호두를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이제 호두를 건조하는 작업이 남았다고 했다.

"옛날에는 햇빛에 말렸는데 지금은 건조기가 나와서 아주 빠르게 건조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말일 수 있다는 것이 강점입니다. 고추, 감, 고구마 등 건조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것이 바싹 말라서 오래 보관할 수 있지요"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요"


건조기는 본채 뒤뜰에 있었다. 호두를 모두 건조기로 옮겨 넣고 김처사는 스님 점심 공양 준비한다면서 툭툭 옷을 털고 본채로 들어가려고 했다. 

"내일은 계곡 쪽으로 비탈진 곳에 있는 호두를 딸까 합니다."

"며칠 있으면 햇 호두맛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수고 값으로 한 봉지 드리겠습니다."


김처사는 껄껄 웃으며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호두를 좀 사겠다고 했다. 청정지역에서 생산된 호두를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다. 



대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줄 준비가 되어있는 듯 푸근하게 느껴진다. 대지는 자신의 모든 결과물을 허락한다. 

그 옛날 숲의 정령을 믿는 사람들은 대지를 주관하는 정령은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가 없도록 살펴본다고 했다. 


숲을 지나 산사로 내려온 바람이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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