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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24. 2024

제이든 선언서

막 출근한 레이철이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붙였다

밤 새 비가 온 후로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집집마다 잔디 마당에 새로 수확한 호박이 장식으로 놓였고 짚으로 짠 허수아비들이 세워졌다. 추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작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빨갛게 타올랐다. 가게 안이 금세 훈훈해졌다. 윤이는 어느새 레이철과 함께 불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뭐라고 재잘대고 있었다. 


얘기 중간에 들어온 조앤이 수지의 말을 받았다.

“진짜 있었잖우. 엄마 아빠가 맨하튼에서 변호사 한다는, 그 왜 제이든 사건.”

제이든 사건이란 학지에 실린 '우리는 선택할 수있어야 한다'는 제목의 선언서 사건이다. 9학년을 마친 15살 제이든은 학지에 기고한 이 글을 부모에게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장의 요지는 그거였지? 왜 부모가 정해준 대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거였잖아”

조앤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요?”

불 앞에 앉아 있던 레이철이 관심을 보였다. 다른 타운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모르는 내용일 수도 있었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자녀에게 설명할 방법이 있기는 할까? 어른들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동안 이야기의 시종을 알고 있는 윤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자기 부모는 자기가 고르겠다는 거지."


애들 보기 부끄러운 이런 일들이 미국 사회에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매사추세츠 미들섹스의 한 타운에서는 3인 이상으로 된 부부의 구성을 허용하는 조례가 통과되기도 했다. 

21세기 문명국이며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동성을 포함한 다부다부제였다. 엄밀히 말하면 아내나 남편이라는 개념도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곧 동물혼 근친혼도 허용될 것이라는 주장도 정설이 된 지 오래다. 


“난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더구먼 아주 잘 쓴 글이었다며?”

수지가 생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출생과 함께 부모가 정해지는 것은 부당하다. 스스로 부모를 선택하고 받아들여질 때까지 생물학적 부모의 모든 간섭은 거부하겠다. 그러나 경제적 의무는 다해달라. 이런 내용이었다는데?”

레이철은 유창한 한국적 표현을 이해 못 하겠는지 흥미를 잃고 제자리고 돌아갔다. 

사실 당시에도 영민한 아이의 현학적 표현을 억지로 해석해 내느라 사전적 용어들이 튀어나왔었다. 학교에서는 아동의 표현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녹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트윗에 아들의 글을 올리고 그의 주장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새 부모를 찾을 때까지 관리감독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단, 경제적 지원은 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하겠지만 밥은 먹여 주겠다고 했다. 

또 어떤 훌륭한 젊은이가 노크한다면 우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서 제이든이 새 부모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청년으로 자라도록 더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부모의 승리였다.

용돈이 끊기고 더 엄격해진 규율에 발이 묶인 제이든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의사가 있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부모와 함께 가족 치료를 받는 조건으로 용돈을 다시 받는 일에 합의했다.


제이든 가정은 강하고 현명한 부모덕에 잘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를 바꿀 수도 있다는 발상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 나라라면 이마저도 부르는 대로 이름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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