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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떡 Sep 06. 2024

마라톤과 가슴 크기의 상관관계

2024년을 시작하며 다짐했다. 올해는 지난 30년 동안 해보지 못한 일을 하자.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 되었던 일, 해야 하지만 내일의 나에게 끝없이 미뤄두었던 일들. 그 중 딱 3개만 골라서 한번 해내 보자. 그렇게 엄선된 나의 버킷 리스트 1번은 달리기였다.


뭐든 잘해야 재미가 있다. 게임도, 운동도. 내가 어느 정도는 잘해야 다음 판이 기대가 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달리기는 최악의 운동이었다. 아무리 있는 힘껏 뛰어도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나는 모든 순간, 나는 뒤에서 일등이었다! 게다가 내 달리기 자세는 많이 우스운 편이어서, 친구들에게 뛰는 자세로 놀림도 많이 받았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선 아무리 반가워도 절대 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랄까. (만화 속 명랑 소녀가 몸을 한껏 흔들며 들판을 달려가는 자세를 떠올려 보시라)


고등학생 땐 새로운 장애물을 만난다. 바로 가슴. 어떻게 하면 나의 작은 가슴을 최대한 지킬 수 있을까를 끝없이 고민했던 사춘기 소녀에게, 달리기란 절대 악과 같았다. 절대적 크기가 작으면 빠질 것도 별로 없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쯤 하프 마라톤까진 완주했으리라.


그런 내가 어쩌다 달리기에 도전하게 됐을까? 달리기가 재밌어 보여서? 전혀! 일주일에 2~3번씩 러닝을 하는 요즘도 달리기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것보다는 ‘가슴, 그까짓 거 좀 빠져도 돼’라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 덕이다. (자꾸 가슴 얘기만 하게 되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 가주시길…)


우리 집 여성들은 전부 C컵 이상이다. 나와 엄마만 빼고. 유독 가슴이 작은 나를 향해 집안 여자 어른들은 나름 걱정을 담아 조언을 해주셨다. ‘나중에 크면 꼭 수술을 해줘라’, ‘어느 정도 볼륨감이 있어야 남편에게 사랑받는다’ 등등. 지금의 가치관에는 맞지 않는 말들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내 작은 가슴을 콤플렉스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는 무조건 보정 속옷만 입었다. 흉통을 세게 조여오는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커 보이고 싶었달까.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어차피 사이즈를 아는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가슴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게 되었다. 다행히 남편은 가슴 크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마음 덕분에 내 가슴도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나에게도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지난 3월 인생 첫 5km 마라톤에 도전했다. 최종 기록은 35분. 단 3분도 뛰기 힘들어했던 내가 5km라는 긴 거리를 35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예전에는 가슴을 키워볼 요량으로 꽉 조이는 속옷을 입었다면,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달리려 스포츠 브라를 입는다. 가슴살은… 뭐 조금 빠지긴 했다. 근데 원래 없어서 별로 티는 안 난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10월엔 10km 마라톤에 도전한다. 솔직히 아직 5km도 간신히 뛴다. 그마저도 혼자서 달리는 날엔 3km가 넘어가면 그만 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럼에도 옆에서 함께 달려주는 남편이 있기에, 꿋꿋이 달려간다. 남편의 애정, 응원 이런 것 때문이 아니다. 그냥 서로 지기 싫어서 뛰는 거다. (패배는 용납할 수 없는 K-장녀&장남 커플) 모쪼록 10km 결승선을 남편보다 빨리 끊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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