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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떡 Sep 13. 2024

첫째 딸은 ㅅㄹ ㅁㅊ?

딸을 딸로 바라봐 주세요

엄마가 사라졌다. 아빠와의 잦은 다툼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것이다. 고작 10살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얼른 커서 엄마에게 힘이 되어줘야 해’라고. 엄마의 첫 가출은 한 달 정도 지속됐던 걸로 기억한다. 깨진 그릇은 다시 붙일 수 없다고 했던가. 이후 부모님의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엄마는 가출과 복귀를 반복하셨고 그때마다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일은 내 몫이었다.


첫째 딸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가능한 어릴 때 부모님의 기대를 꺾어 버리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K-장녀들이여,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아쉽게도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던 나는 착하고 성실한 딸로 성장해 버렸다. 대학교에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틈틈이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실 땐 기꺼이 적금을 깨서 보태드렸다. 동생이 기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두 달 치 월급을 털어 신상 노트북을 사주기도 했다.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고, 엄마가 행복해지려면 내가 더 가족들을 살뜰히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동생이 대학을 진학한 후 깨달았다. 그동안 괜한 일을 했었다는 것을. 나와 달리 동생은 흔한 아르바이트 한번 않고 용돈을 받아 썼으며 집안의 문제가 있을 땐 ‘아직 20살밖에 안 된 막내 아들’이란 프레임에 쌓여 보호받았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나의 상황이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돌이켜 보니 나의 20대에 ‘나’는 없었다. 책임감만 있었을 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는 항상 뒷전이었다. 부모님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너무나 쉽게 나의 가치를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프레임에 가둬버린 것은 나 자신이니까. 이제라도 돌이키기로 결심했다. 나를 더 사랑해 주기로, 부모님에게 휘둘리지 말고 내가 진짜 가고 싶은 길을 가기로.

앞으로 내 임무는 그저 귀엽게 사는 것

그 여정 가운데 남편을 만났다. ‘죽었다 깨어나도 결혼 따위는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은 남편을 만나고 산산이 깨졌다. 결혼 안 한다고 말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한다는 그 말. 사실이었다. 나는 아닐 줄 알았는데. (세상일에 ‘절대’는 없으니 미리 말조심하자)


엄마께 처음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난 우리 집 상황이 좀 더 해결된 다음에 네가 결혼한다고 할 줄 알았다’ 등등.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을 하시며 일주일간 나와 대화를 거부하셨다. 나 역시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엄마한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냥 나를 많이 의지하셨으니 그만큼 놀라셨겠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혼 생활이란?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것 #_#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부모님을 탓할 생각은 없다. 엄마도 아빠도, 그 순간 나를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막상 나도 결혼해 살아보니 결혼 생활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경험 덕에 조금 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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