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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떡 Sep 27. 2024

세탁 한 번에 100만 원 날릴 뻔

겨울에서 봄으로. 자연이 옷을 갈아입던 때의 일이다. 포근해진 날씨에 맞춰 두꺼운 이불을 걷고 새 계절에 맞는 침구를 꺼냈다. 추운 겨울을 따스하게 감싸줬던 겨울 이불과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미리 조사해 둔 양모 이불 세탁 방법에 맞춰서 작동 버튼을 눌렀다.


난 결혼할 때 예물, 예단을 건너뛰었다. 원래 시계나 가방에 관심 자체가 없던 터라 굳이 예물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못 느꼈고 예단 역시 번거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양가 부모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의견을 이해해 주셨다. 그럼에도 친정엄마는 내심 아쉬워하셨다. 딸이 시집을 가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다며 거의 매일 나를 닦달(?)하셨다. 여러 번의 회유에도 딸 내외가 끄떡하지 않자 엄마는 우리 부부의 생필품으로 관심을 돌리셨다. 그중 하나가 이불이었다. 무조건 좋은 이불을 살 것! 이마저도 엄마의 지인이 운영하시는 가게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서울 백화점까지 방문해 100만 원을 주고 사 왔다. (엄마들은 왜 인터넷 검색보다 지인 입소문을 더 신뢰하실까? 정답을 아시는 분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길 바란다.) 이불을 사기로 결정하기까지의 정신적 비용, 왕복 3시간의 이동 시간을 더하면 100만 원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 셈이다. 포털에서 초저가 이불만 검색해 구매했던 나에겐 어마어마한 사치품같이 느껴졌다.


나에겐 초고가 이불...


‘띠리링’ 세탁기가 울렸다. 드디어 나의 초고가 이불이 목욕을 마쳤다. 세탁기 문을 연 내가 마주한 건 물에 젖은 천 덩어리였다. 이불을 채웠던 폭신폭신한 내장재는 사라지고 바스락거리는 천만 남아 있었다. 머리는 띵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엄마가 없는 살림에 비싼 돈을 주고 사주신 이불인데 첫 세탁을 망치다니! 딱 한 계절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고 엄마에게 미안했다. 축 늘어진 이불을 건조대로 옮겨 널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남편이 갑자기 “어? 이거 양모 아니고 거위 털인데?”라고 외쳤다. 그렇다. 이불의 커버는 양모지만 내장재는 거위 털이었던 것. 설명서, 조리예는 절대 꼼꼼히 안 읽는 나의 나쁜 습관이 또 발동된 것이다.



거위 털 내장재는 세탁을 최소화하는 편이 좋다고 한다. 건조기의 이불 털기 기능으로도 충분하다고. 불가피하게 세탁이 필요하다면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라고 적혀 있었다. 내 손으로 이불을 빨아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걸 알 턱이 있나! 새삼 손에 물 안 묻히고 정성스레 키워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순간이었다.

긴 토론 끝에 일단 이불을 뉘어서 말리기로 했다. 널 데가 마땅치 않아 의자 4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간이 건조대를 만들었다. 그마저도 의자를 떨어뜨려서 마룻바닥에 큰 홈이 파였다. 지은 지 1년도 안 된 신축 아파트 마룻바닥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것. 지옥 같은 2시간이었다.


감쪽 같이 고쳐두었다!!


이날의 교훈. 신혼살림으로 꼭 비싼 물건을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물건의 값어치대로 아끼며 사용할 수 있을 때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특히 나와 같은 파괴왕이라면 더더욱 적당한 가격의 물건을 적당 기간 사용하도록 하자. (르쿠르제 접시는 단 1회 사용 후 깨뜨렸고, 이름도 못 외운 어느 브랜드의 후라이팬은 재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태워 먹었다. 말할수록 나의 치부가 드러나니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아! 우리 집 초고가 이불은 다행히 잘 말랐다. 물론 뽀송함이 이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소중히 아껴가며 쓰고 있다. 이불에 담긴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색이 바래 없어질 때까지 고이고이 함께할 계획이다.




여러분도 어설픈 살림 솜씨로 

소중한 물건들을 망가뜨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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