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사라졌다. 아빠와의 잦은 다툼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것이다. 고작 10살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얼른 커서 엄마에게 힘이 되어줘야 해’라고. 엄마의 첫 가출은 한 달 정도 지속됐던 걸로 기억한다. 깨진 그릇은 다시 붙일 수 없다고 했던가. 이후 부모님의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엄마는 가출과 복귀를 반복하셨고 그때마다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일은 내 몫이었다.
첫째 딸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가능한 어릴 때 부모님의 기대를 꺾어 버리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K-장녀들이여,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아쉽게도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던 나는 착하고 성실한 딸로 성장해 버렸다. 대학교에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틈틈이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실 땐 기꺼이 적금을 깨서 보태드렸다. 동생이 기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두 달 치 월급을 털어 신상 노트북을 사주기도 했다.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고, 엄마가 행복해지려면 내가 더 가족들을 살뜰히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동생이 대학을 진학한 후 깨달았다. 그동안 괜한 일을 했었다는 것을. 나와 달리 동생은 흔한 아르바이트 한번 않고 용돈을 받아 썼으며 집안의 문제가 있을 땐 ‘아직 20살밖에 안 된 막내 아들’이란 프레임에 쌓여 보호받았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나의 상황이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돌이켜 보니 나의 20대에 ‘나’는 없었다. 책임감만 있었을 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는 항상 뒷전이었다. 부모님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너무나 쉽게 나의 가치를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프레임에 가둬버린 것은 나 자신이니까. 이제라도 돌이키기로 결심했다. 나를 더 사랑해 주기로, 부모님에게 휘둘리지 말고 내가 진짜 가고 싶은 길을 가기로.
앞으로 내 임무는 그저 귀엽게 사는 것
그 여정 가운데 남편을 만났다. ‘죽었다 깨어나도 결혼 따위는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은 남편을 만나고 산산이 깨졌다. 결혼 안 한다고 말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한다는 그 말. 사실이었다. 나는 아닐 줄 알았는데. (세상일에 ‘절대’는 없으니 미리 말조심하자)
엄마께 처음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난 우리 집 상황이 좀 더 해결된 다음에 네가 결혼한다고 할 줄 알았다’ 등등.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을 하시며 일주일간 나와 대화를 거부하셨다. 나 역시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엄마한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냥 나를 많이 의지하셨으니 그만큼 놀라셨겠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혼 생활이란?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것 #_#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부모님을 탓할 생각은 없다. 엄마도 아빠도, 그 순간 나를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막상 나도 결혼해 살아보니 결혼 생활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경험 덕에 조금 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