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시작 전날, 남편과 무얼 하며 놀지 고민하던 나의 눈에 먹잇감이 포착됐다. 바로 송편 만들기 키트. 맛있는 송편을 잔뜩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부모님들께 우리 부부의 솜씨를 자랑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는 잠시 잊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요리 똥손이라는 사실을. 애당초 우리 부부에겐 내세울 만한 '솜씨'랄 것이 없었다. (자기 객관화가 이래서 중요하다.) 찰나의 실수로 나와 남편은 황금 같은 일요일에 5시간 동안 송편을 빚는 형벌에 처하게 된다.
“손으로 조물조물 하트 모양을 내고 이쑤시개로 복숭아를 표현해 보세요. 참 쉽죠?”
배송을 기다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유튜브 선생님들께 조언을 구했다. 하나 같이 ‘어렵지 않다’를 강조하시며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먹음직스러운 복숭아 송편을 뚝딱뚝딱 만들어 내셨다. 인스타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예쁜 송편이 이렇게 쉽고 간단하다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 기대감은 반죽 시작 10분 만에 처참히 무너졌다. 키트에는 5가지 색의 가루가 들어있었는데, 내가 만든 5가지 반죽의 농도가 다 제각각인 것. 어떤 건 뚝뚝 끊어졌고 다른 건 수제비 반죽 마냥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뻑뻑한 반죽은 물을 조금 더 넣으면 되지만 이미 촉촉을 넘어 축축해진 반죽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잠시 설명서 탓을 해보자면 ‘농도를 확인하며 적당히 물을 추가하라’고만 적혀 있었다. 요리 잘하는 사람의 ‘적당히’와 나의 ‘적당히’는 언제쯤 원만한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결국 쪄보고 맛있는 색깔만 골라 선물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반죽 점도가 다섯 단계이니 그중 하나는 맛있는 게 있으리라! 이후 이어진 대망의 모양 내기 시간. 복숭아는 고사하고 동그랗게 빚는 것조차 힘들었다. 쩍쩍 갈라지는 반죽과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깨소 탓에 반죽 크기는 점점 커졌다. 결국엔 한 입에는 절대 넣을 수 없는, 거대한 송편이 완성됐다. ‘모양은 이래도 맛만 있으면 되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했지만… 20분 동안 사우나를 마치고 나온 송편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찜기 뚜껑을 열자마자 상한 복숭아들이 까꿍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색이 예뻐 더 공을 들인 보라색 가루가 지옥에서 온 복숭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요리 상식! 가루는 찌면 색이 더 진해진다!) 다른 송편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맛은? 살면서 먹어본 떡 중에서 제일 맛이 없었다.
지옥에서 온 송편들은 시댁과 친정으로 배달됐다. 이미 송편을 빚어가겠다고 소문을 내놓은 탓에 무를 수가 없었다. 송편을 맛보신 부모님들은 애매한 웃음과 흔들리는 눈동자로 답변을 대신하셨다. 그렇게 의욕만 앞선 신혼부부의 송편 만들기는 벌칙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노력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예뻐 보이셨는지 어머님은 나의 수고를 칭찬하시며 제사상에 올리기까지 해주셨다. 얼굴도 뵌 적 없는 조상님들께 죄송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