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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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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령 Oct 26. 2024

냉정과 모정 사이

"오매.  어떻게  저런 일이... 저러다 말것이잉."


전쟁이 발발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국군의 개성 방어선이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연월리 사람들은 반응이다. 삼팔선 부근의 일상적인  교전으로 치부하기엔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일부러 무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등내 양반은  다가오는 장마를 대비해 논에 나가 논둑을 고치다 논 가운데  훌쩍 자란 피 하나를 발견하곤  깊은 한숨을 쉰다.  고무신을 벗고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뒤   삽머리를  논 둑에  꼽아 세워놓고  갓 심은  어린 모들 사이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들어가  피 한포기를 뽑아 손에 들고  기어 나온다.

비목처럼 세워둔  삽자루를  뽑아 다시 논둑을 고치려다   무릎  뒤 장딴지의  불쾌하고 익숙한 통증을 느낀다.  거머리가  피를 빨고 있는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다리 뒤에  달라붙은 거머리를 발견하고 뻣뻣한  몸을 뒤로 옆으로  구부려  손으로  떼어내려 한다.  그러나 평생 궂은 농사일에 단련 되어 두툼한  손가락은 거머리의  둘러싼  끈끈한 점액에 미끄러질 뿐이다.  한참 동안  피를 지키려는  사람과   피를 빨려하는 거머리의  국지전이 벌어진다.   

짜증이 난 등내 양반은 거머리가 붙은  장딴지를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이에  몸을 쭉쭉 늘려  똥구멍과 입의 빨판을  살에 바짝 흡착시키고 있던 거머리는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땅으로  툭 떨어지고 만다.   생각지도 못한 적군의 전술에  놀란 거머리는  빠른 속도로  모기지, 논으로 후퇴한다.  

거머리가 땅에서 떨어진 것을 늦게 알아챈 등내 양반이  장딴지에서 떨어져 나간 놈을  수색하다   논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패잔병을 찾아낸다.  이때  거머리는 거의 물에  닿기 직전이었다. 등내 양반이  삽 끝으로  거머리를 두 동강을 낼 요량으로  몸  한가운데를  겨냥하고 찍어 누른다.  탁. 꾹.  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거머리는 삽 끝에 밀려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찰나의 순간 그의 동족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유언이   진흙을 뚫고  나온 비명처럼 온 들에 울려 퍼진다.  "살고 싶다."

등내 양반은 어린  쑥의 머리를  부러뜨려  거친 손으로  짓이긴 후  거머리가 남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는다.   피를 닦는 등내 양반의  왼쪽 입꼬리가  한쪽만 살짝  올라간 채로 비뚤어져 있다.  피를 빨려고 달라붙은 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자기 장딴지를  후 드려 팬 후, 자기 논을 기름지게 하는 품앗이 일꾼을 잔인하게 살해하여 매장하였음에도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살귀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놈은 그 동족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은밀한 언어로 귀엣말을 한다. "니깟지거." 



십자가 첨탑을 올린  천원 교회는  처음으로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사오십명의 성도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린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이다.  이마에서 빛을 뿜어내는 카랑카랑한 목청의 목사가  성경 구절을 낭독하자 성도들의 입에서 연신  아멘 아멘이  터져 나온다.   오늘의 설교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40년을 헤맬 때  지금의  우리처럼 천막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여러 고난과 수난을 겪고 단련된  민족은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나라를 건설하였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까.  믿습니다. 아멘.  그것을 정말로 믿으신다면  예배가 끝난 후에  노방전도에 참예하여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신실한 신자들은  예배가 난 후에 교회에서 준비한 팥시루떡을 나눠먹고   삼삼오오 조를 짜서  전도지를 들고 근처 마을로 걸어간다.  

덥고 습한 날씨에 긴팔 와이셔츠에  검은 양장을 입은  세 남자는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을  하얀 세모시 손수건으로   닦는다.   천원에서 연월리까지 십리 길을 걸어온  남자들이  뽕나무 옆 새암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여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전도지를 건넨다.

"자매님들 안녕하세요."

"아이구구.  깜짝이야."

세 남자를 등지고 앉아 빨래를 하느라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대흥댁이 놀라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천원 교회에서 노방 전도를 나온 기독교인들입니다."

세 남자 중에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가  한걸음 더 다가와 대흥댁을 달랜다고 한 소리다.  

"어매.   다 놀란 녘에  놀라지 말라고 허면 뭔 소용이여.  어매매매."

그러자 마흔 살 정도의 신수 좋아 보이는 이가   젊은 남자를  매섭게 노려 보다가  앞으로 나선다.

"아. 놀라게 해 드려서  미안합니다.  저는  군수 김민수입니다.  천원 면사무소 앞 양조장 아시지요?  거기가 제  외가였습니다.   지금은 그 양조장을 헐고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술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사단의  술책이니까요.  하하.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물처럼 솟아나는 샘터 같은 교회를 짓고 있지요.  바로 이곳처럼 말입니다. 하하."

젊은 군수는  상황을 수습하고 있는   자신에게 취한 듯이  벌게진 얼굴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다.   '아이고.  그 넓은 양조장을 다 헐어버리고 교회를 짓는다고요?  거기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데 그 땅을 전부 교회에 헌납하신 거여라. 참말로  믿음이 좋으시구만요.  그 양조장집 사위가 친일은  했지만  광복된 날에  목을 매서 돌아가셨지라.  죽음으로 속죄한 사람한테 어떻게 또 죄를 묻것습니까?  그 시절엔 일본이  조국이었으니까요. 여하튼 그렇게 대단하신 군수님이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셔서  비천한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겠다고요?  그 말씀이 무엇인가 한번 들어 보고 싶은데 해주실 수 있것습니까? '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가올 줄로 기대하고.  

"그런디요? 용건이  있을 것 아니요?"

마루에 누워 있는 남편을  달달 볶아  논에 보낸 후에  빨래를 하러 나온 등내댁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시비조로 묻는다.

"아아. 용건이. 용건이..."

용건이 뭐냐는 질문에 할 말을 잃은 민수가 주춤거리자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제일 젊은 남자에게  "세장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자신의 상관인 군수의  동정을 살피느라   그 말을  듣지 못한다.  민수가 젊은 남자를 향해  "야, 전도지 세장"이라고 하자 그제야  허둥지둥  가죽 가방에 든  종이 뭉치에서  전도지 세장을 꺼내  "목사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가장 나이 많은 남자에게 정중하게  건넨다.

전도지를 손에 쥔 목사는  예의를 차리며 세 여자에게 전도지를  내밀며 말한다.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십시오. "

"이게 뭐신디요? 삐라요?"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구세주입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  예수 믿으십니요. 

나이 든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읍한 목소리로  경건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천국으로 인도해?  우리가 죽으면 천국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잔가?  그 외아들 예수가?  긍게 그  저승사자를 믿으라고?"

등내댁이  목사의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려고 하자  대흥댁이  등내댁을 말리려는 듯 세 남자에게 말한다.

"우리가 시방 빨래허느라  손이 젖어서  그것을 못 받은 게 거기  위에  올려놓고 가십시오.  이따 집에 가서 읽어보고  맘이 동허면  나가든가 헐턴게요.  이렇게 꿉꿉헌 날에  검은 양장을  빼입고 오셔서 진짜 저승사자가 온 줄로 알았고만요.   고생이  많으실 텐데 시원한 물 바가지 드시고 가셔라.   여기 물 맛도 좋은 게요."

세 남자는 돌 위에 전도지 세장을 놓고  뽕나무에 걸려있는 바가지로 우물물을  떠서 마시며  씁쓸한 표정을   감춘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따. 대흥댁은 냉수 먹고 속차리라는 말을  고상스럽게도 하는고만.  보천교도라 그런가?   서로서로 입장이 비슷헌 게."

세 남자에게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등내댁이 대흥댁에게 대들듯이 말하자 대흥댁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사람 면전에 대놓고 그러믄 되것는가.  다 같이 사는 세상이네. "

대흥댁은  물을 마시는 세 남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보천교당을  채운 신도들을 생각한다.  남편 없는 과부들, 부모를 모르는 고아들,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들,  조강지처를 잃은 늙은 남자들이  태반인 교당에 들어서면  들큼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흡사 감이 썩으면서 마르는 냄새.  가을에  잘못 간수한  감이 처마 밑에서 곰팡이를 피우면 겨울에도 파리떼가  날아와  곯은 과육에  달라붙어 간절하게  손을 비볐다.   아버지 없는 우리 새끼들 굶어 죽지 않기를 비옵니다.  내일은  좋은 어른을 만나 얻어맞지 않고 배를 채울 수 있기를 비옵니다.  우리 아무개가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비옵니다.  새 아내가 생기기를 비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파리 떼 같은 신자들이  바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감히  사랑, 구원, 천국, 소망이라니.  그것들이 무엇일까.  과연 예수는  믿어봄직할까.
 
"저렇게  잘난 남자들이  이 더운 날에 양장을 빼입고 걸어서 포교 활동을 허는구나. 기독교는.  보천교에도 저런 남자들이 딱 열명만 있었으면 좋것네.  천주님.  보천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나이까."



      
그늘에서 물을 마시며 한참  몸을 식혔음에도  민수는 열이  오르는지   넥타이를 풀며 목사에게 말한다.

"목사님, 노방 전도 사역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겠니까? 오늘 새벽에 북한군이 38선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교전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대비를 해야지요.  거룩한 주일에 그런 짓을 하다니. 공산당 놈들. 참."

"그래요. 장로님. 그렇게 합시다.  같이  돌아가시지요. "

함께 돌아가자는 목사의 대답을 들은 민수가  눈알을 부라리며 젊은 남자에게  말한다.

"최 비서. 너는 남아서 부락민들 한테 전도지 다 뿌리고 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직접 전해주고  사람이 없으면 대문에 잘 끼워 넣고 오라고.  나 먼저 갈 테니까.  공산당 놈들... 참 주일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네, 군수님. 알겠습니다."

최비서는 차렷 자세로  서서 목사와  민수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뒤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전도지가 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빨래하는 세 여자를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시발년들"



빨래를 하던 세 여자 중의 한 명,  원천댁은  아무  말이 없다.  장마 오기 전에 해야 할  빨랫거리가  많기도 하고  자기 마음에 쌓인 걱정거리로  인해 남의 일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다.  편지를 보내오지 않는  정애가,  돌아온 영달이,   남편이 젊은 과부에게서 본 씨앗이, 개성댁이, 변해가는 양길이   물 먹은  솜옷처럼  무겁기만 하다.   

두 달 전, 원천댁이  가지 말라는데도 정애는  과부댁이 낳은  대수의 막내딸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 양길에게서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이복동생의 돌잔치에 참석한 사 남매에게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돌쟁이 딸과, 큰딸과  다섯 살 차이인  두 번째 첩을 정식으로 선보였다고  했다.   한대수는 아이 이름은  정애와 같은 돌림자를 써서 '순애'라고 지었으며 너희들과 같은 한 씨라고 했다.  대수는 순애를 번쩍 안으며 오 남매 모두 귀한 한 씨 자손이니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고  어린 순애의 볼에 쪽 입맞춤을 해서  민망했다고 했다.  

돌잔치를 보고  온 날,  정애는 별말 없이 저녁을 먹고 개성댁, 원천댁과 방에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벽돌 공장이 끝난 후에 야학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야기,  야학교 학생이었다가  야학교 선생이 된  자신을 학생들이 무척 잘 따른다는 이야기, 그곳에선  학생 선생 구분 없이  서로 아끼며 돕고 가르친다고 하며 정애는 환하게 웃었다.  원천댁은 그간에  정애의 편지를 통해 알았던 이야기라  별생각 없이 듣고 있는데  개성댁이 딴지를 걸었다.   

"정애야. 너 시집가야 하지 않겠니?  니가 등골 빠지게 그 애들 가르친다고  그 학생들이 니 자식이 되는 것도 아니잖니?  여자는 자식이 있어야 돼.   부족한 듯해도  적당한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여자가 되는 거야. 여자는 자기 혈육이 있어야 해.   제발 잘 먹고 잘 살 궁리를 하렴. 힘들게 일하고 배워서 남 퍼주는 거 그만하고."

 "개성댁 아주머니.  저는 저만 잘 사는 게 아니라   좋은 세상에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있어요. 내가 그런 세상을 못 보더라도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우리 후세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실 바랄 뿐이에요.  제가 몸단속을  못하는  여자라서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왔을까요?  아주머니가 집도 절도 없이 이곳에 와서 지내는 것이 아주머니의 잘못일까요?  어머니는 첩이 낳은 자식이 우리 호적에 오르는  것을 왜 말리지 못할까요?   일본이 물러갔는데도  왜 친일파들을 처단하지 않고 그대로 둘까요?  이유를 아세요? 그래도 되는 세상이니까.  이 나라가  통째로 썩었으니까.  해방이 되었으니 곧 좋은 세상이 올거라고요?   아주머니. 이 나라는 해방되지 않았어요.  해방을 당했을 뿐이죠.  이런 나라에선  뭘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라의  기본틀부터  다 바꿔야해요.   공산주의 혁명은... "

정애의 입에서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원천댁이 입막음을 하듯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다.

"정애야. 그만해. 그만. 개성댁 말이 맞어.  얼른 시집가. 그만해. 그만해."

'엄마... 엄마도 모르겠어?   난 이미 결혼했다고 생각해.  내가 구제할 인민과..."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간  정애는 두 달 넘게 편지를 보내오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길래.  

영달은 집에 돌아온 뒤로  천원 교회를  짓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집을 고친다.   해뜨기 전에 나갔다가 해가 진 뒤에 돌아오기에  손바닥만 마을에서  영달과 원천댁은 두 달 가까이 마주친 적조차  없다.  양길로부터   학교 다녀오는 길에 옻독이 오른  단곡댁의 약을 지으러 약방에 간  영달을  읍내서  만나  같이  약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양길은 영달이  약방 앞에서  손톱을 뜯고 서있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웃는데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양길은 요 몇달사이  무섭게 자라고 있다.  영양가 있는 것을 먹이지 못하는데도 올해 들어 형들과 아버지의 키를 능가하였고 어깨가 벌어지고 있다.   미성의  목소리가 탁하게 변했으며 털북숭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원천댁을  닮아 작고 귀여웠던  양길이 영달을  점점 닮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  원천댁이  읍내에서 본 수배자 벽보의 얼굴은 영달이었다.  머리가 짧고 수염이 없는 예전의 영달.  벽보 옆에는 '제주도에서 도망친 공산주의자. 반란의 수괴 이학수 (가명:이영달)'라고 쓰여있었다.  누군가 영달의 발바닥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본명이 이학수일 거라 짐작하여  적은 것이다.  이제야  겨우 자기 인생을 살게 될 줄로 알았건만  영달의 운명이 장맛비에 쓸려가는  모래톱처럼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불쌍한 사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리고 남편의 막내딸,  순애.  원천댁은 순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애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딸의 이름을  순애로  짓길 원했지만  자신이 극구 반대했다.  자신의 이름인  '복순'에  들어가는  '순'자를 딸의 이름에 쓰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고 반대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어떤 것도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남편에겐   말하지 못했다.  정애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  남편에게  왜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 지으려고 했냐고 물으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  '순정'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원천댁의 이름에 '순'자가 들어있어  좋았다는 말을 하며 바보처럼  흐흐 흐흐흐 웃었다.   그들이  처음 보았을 때처럼.   문득 남편의  딸, 순애가  보고 싶어졌다.  어제 읍내  점방  앞을 서성이다 보니   대수가  순애를 목마 태우고  나와 가게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딸 자랑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애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버지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데도  대수는 바보처럼  흐흐 흐흐흐 웃기만 했다.   그 순간 남편을 향한   차고 냉랭한  마음이   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대수를 더 오래  끝까지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론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


그리고  양길과  개성댁.  며칠 전에  양길이 원천댁에게 물었다.

"어머니. 만약에요.  제가 없어지면 저를  찾으러 다닐 것인가요?"

"양길아. 그런 말 하지 말어.  무서워."

"어머니 제가 없어지면 다  버려두고 저를 찾으러 다니실 거냐고요?"

"양길아. 그런 말 하면 못써.  말이 씨 될라."

"어머니. 어머니.  제가  누님처럼 그렇게 사라지면 다른 자식들 다 버려두고 저 찾으러  오실 거냐고요?"

"그만해.  그런 말 듣기 싫어.  싫어."

원천댁의  대답을 들은 양길의 표정이 싹 굳더니 집을 나가  반나절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문간을 서성이며 양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뽕이 든 가마니를 머리에 인 개성댁이  양길을  애타게 부르며 집으로 걸어왔다.

"양길아.  양길아"

"양길이는 왜 찾는가?"

뽕 가마니를 대문 앞에 내려놓으며 개성댁이  목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목이야. 애야가  올해 봄 누에 안친다고 산 위에 있는 자기네  뽕을 따가라고 해서 뽕을 따긴 땄는데  다 들고 올올 수가 없어야죠. 양길이 좀 시키려구요."

"양길이 나갔네."

"얘는 공일에 어딜 나갔어?  어마니들 돕지 않고."

"양길이가 자네 자식인가. 왜 남의 아들을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여?"

"형님두 참.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제가 누에를 왜 키우겠어요? 우리 양길이 학비에 보태려고 하는 거죠.  이 한 목숨 저깟 누에 안 키운다고 굶어 죽겠어요. 형님은 제 마음 알면서  걸핏하면  아들 타령으로 저를  면박 주시고. 너무 서운해요.  형님이 반 낳았고 제가 반 키운 애예요."

 "쳇. 아까 양길이가 나한테 묻더라고. 자기가 누이처럼 사라지면 찾으러 다닐 거냐고?"

"그래요?  하하. 그거 어제 저한테  물어봤는데.  자기 없어지면 찾으러 올 거냐구요.  그래서 '어마니가 아들 찾으러 가는 게 당연하지.  니가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간다'고 했더니.  막 웃던데요.  아직 아기야.  몸집만 컸지.  호호. 뭘 그런 거로 속상해하세요.  이젠 정애도 잘 사는 걸.  어휴. 그나저나 뽕은 어떻게 가져오지?"

개성댁이 마루에  뽕 가마니를  올려놓고  수건을 탈탈 털면서 나간 뒤, 어둑어둑한 그 길로  양길이 걸어올라왔다.  원천댁에 양길에게 다가가  "찾으러 갈 거여"라고 말하자  양길은 허무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셨서라"라고 말하며 원천댁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양길의 턱과 코밑에 거뭇하고 쓸쓸한 수염이 올라와 있는 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막내아들이 낯설고 어려워졌고 개성댁은 더할 나위 없이 꼴 보기가 싫어졌다.



전쟁이 난 다음날 오후엔  서울과  맞닿은 의정부가 함락되었다는 라디오 방송이 나왔음에도  연월리 사람들은  차분하다.  다다음날 북한군이 내려올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방송을 들으면서는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도 있다.  광복 이후  일본이 두고 간 권력을  잡기 위해  이념과 사상을  창과 방패로  삼은 모순적인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실용주의 실존주의 합리주의 염세주의 전체주의 허무주의...  저마다의 주의로 갈기갈기 찢긴 민족은  자기 주의가  옳다고 귀를 막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냥 소리만 질렀다면.  그러던 중 성명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송구스러운 두 사람들이 동족의 흉탄에 스러졌다.  몽양과 백범.  기막힌 두 죽음에 앞에서   몽양과 백범을 존경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 못하였다.   눈물없는 장례식을  치룬 사람들은  지독한 냉소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수도,  서울은  많고 많은 주의자 중에  승리한 한 주의자가 점거한 점령지 같은 곳이었기에 그곳의 피난민들이 건너는 다리가 폭파됐어도  대통령이 남몰래 피난을 가버렸어도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될대로 되어라.  이제 모르겠다. 망하기밖에 더 하겠나. 이미 망한 것을.



7월, 본격적인 장마가 오기 전에 겨우 누에를 다 올린 개성댁이 원천댁에 말한다.  

"형님,  저 개성 갈래요.  우리 어마니 모시러 가야겠어요.   북쪽은 난리가 났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요.

"괜찮아지면 가지 그려."

"형님. 가서 어마니 모셔와도 될까요?  누에는 다 올렸으니까  고치 되면 형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그리고  양길이한텐 저 개성 갔다고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절대루요,   차라리 전쟁 나서 다 버리고 도망갔다고 해주세요.   절대  개성에 갔다는 말씀 하시면 안 돼요."

개성댁은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서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떠났다.

떠나기 전, 개성댁이 양길이 자고 있는  방앞에  한참 서있다 방문을 연다.  방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사내 냄새에 고개를 획 돌리고 눈살을 찌푸린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문 옆에   앉아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리니  어느 순간,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  곱게 감은 두 눈,   둥그스름한  순한  코,   먹성이 좋은 입술이  암흑 속에서   두둥실  떠오른다.  어쩜 저렇게 잘생겼을까.  아들의 미모에 깊이 탄복한다.  아들의 숨소리에 귀을 기울인다.    쌕쌕.  커다란 몸에 비하면  가냘프고 애처로운 들숨과  날숨이다.  가슴이  씀벅씀벅하다
 
'내 새끼  한양길. 너는  정모현 자식이여.'



그날 저녁  학교에 다녀온 양길이 개성댁을 찾는다.  원천댁이 읍내에 볼 일이 있어서 새벽에 나갔다고 둘러대자 양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다음 날까지 개성댁이 돌아오지 않자  양길은  발악을 하듯 어마니가 갈 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개성댁이 보이지 않자 양길은 거의 미친 듯이 원천댁에 소리를 지르며 덤벼 든다.

"내 어마니 어디 가셨어라? 어머니가 쫓았어라?  어마니 어디 갔는지 말씀을 하셔라. 어머니는 알지요?  어마니  혹시 개성 가셨는가요?  할머니 만나러 개성에 가셨지요?"

거뭇한  콧수염이 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하얘지도록 꼭 쥔 주먹으로 방바닥에 천공을 낼 듯  쿵쿵 내려치며 원천에게 따지는 것이다.

"양길아.  정신 차려라잉.  이게 뭐 하는 짓이여.  개성댁이 왜 니 어머니여?  개성댁은 니 아버지 첩이여. 첩.  너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넘이라고. "

"넘이라고. 어마니가 넘이라고요. 쳇.  어머니가 날 버리고 누나 찾으러 갔을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어요?  난 그때 다섯 살이었라.  내가 어머니를 찾겠다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온 동네를 다 다녔어라.  그때 내 성질을 다 받아주고 달래준  사람이 어마니여라.  그리도 어마니가 나한테 아무리 잘해줘도  나는 어머니만 기다렸어요.  누나가 돌아오면  어머니가 나한테 같이 살자고 헐 줄 알았어요.  그때도 어머니는 누나만 붙잡고 나를 모른 체 했단 게요.  어머니는 나를 또 버린 것이어라.  내가 오 년 전에 무작정 연월리에 그냥 눌러앉지 않았으면  우리가 같이 살게  되었을까요?  아니.  나를 그냥 아버지 집에 버려 두었것지요.  왜 나를  낳은 것이여라?  왜?   키우지도 않을 거면서.  내가 그동안 어머니 앞에서 얼마나 동동거렸는지 몰르지요.  또 버려질까 봐.  어마니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찾으러 온다고 하셨어라.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 어마니여라.  어마니는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디. 우리는 마음이  통한게로."

"이 놈의 자식. 너 속으로 그런 맘 품고  살었구나 썩을 놈의 자식.  겉으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개성댁이랑 나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너한테 잘해주나  재면서 살았구나. 이  음흉한 놈.  내가 왜 그렇게 누나를 찾으러 다녔는지 아냐?  사내 새낀게 모를 수도 있것지만  누나 몸의 흉을 봐라.  아무리 더워도 소매하나 못 걷고 살어.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누나가 무슨 일을 겪었을지 짐작이 안 가냐?  평생 그런 몸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  불쌍허지도 않어?  여자가 말여. 어떤 남정네가 누나랑 결혼을 헐라고 허것냐?  너는 이다음에  좋은 색시 만나 결혼 허면  이 집 나갈 거 아녀?"

"누나는 잘 살았어.  지금도 잘 살고 있어.  늘 엄마가 문제였지라.  누나가 엄마처럼 될까 봐 벌벌 떨었응게.  누나가 연월리 떠나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어요? 자기 어렸을 때 꿈이 목수한테 시집가는 거였대.  엄마가 누나한테  선생님이 되라고 해서 여학교  간거래.  자기 원래 꿈은 아버지 같은 목수랑 결혼해서 애야 누나 이웃으로 늙을 때까지 사는 게 꿈이었대.   엄마가  싫었던 거지.  엄마가 목수 아내로 사는 것이 싫었거나.  아버지가 싫었거나.  아니면  딴 남자가 좋았거나."

"너... 너... 이 음흉한 자식. 후레자식... 어떻게... 어떻게..."

"뭐?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알았어. 엄마가 영달아재 이야기 헐 때,  영달 아재 얼굴을 쳐다볼 때,  어떤 얼굴인지 알어?  누나 보는  얼굴이여.  불쌍해서 죽겠는 얼굴.  영달 아재도 날 볼 때 그런 눈빛인게. 근디 내가 어떻게 그걸 몰라. "

"나가. 나가.  이 놈의 자식아. 그려. 니 어마니한테 가. 개성에 가서 니 어마니 만나서 잘 먹고 잘  살어. 이 흉악한 놈."

양길은 그 길로 집을 나가서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속이 타들어가는 원천댁이 찾아간 곳은  기와를  다 올린 영달의 집이다.
 

영달이  마당에서 새끼 거위들 뒤를 쫓아다니며  모이를 주고 있다.  거위의 어미라도 되는 듯 곽곽 거위 소리를 흉내 내며 돌아래 모이를 숨겼다가 새끼들이 모이를 찾으면 돌을 치워주고 다른 곳으로 가면 먹이로 유인해 돌아래 숨겨진 모이를 찾게 하는 것이다.  제비가 영달의  머리를 쪼아대며 자신에게도  먹이를 달라고 졸라대지만  집 주인은 시치미를  떼고 거위 새끼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영달은 어느 때보다  여유 있고 편안해 보인다.  원천댁은   평화가  깨질  것이라는  생각에  무너질 것같은  가슴 부여잡으며   영달에게 걸어간다.

"영달아. 제비한테는 왜 모이를 안주는 것이여? 아까부터 니 머리를 빙빙 돌면서 먹이 달라고 땡땅을 부리는 것 같은디."

"복순이 왔냐.  왜 제비한테 먹이를 안주냐고?  나도 참고 있는 거여.  제비는 여기서 여름 나고 강남으로 날아가잖여. 거기 가면 자기 힘으로 먹이를 잡아서 먹어야 되니까.  사람이 주는 거 먹기 시작하면 사람만 쫓아다닐 거 아니여. 히잇.  사실은 저번에 제비 새끼들이 너무 귀여워서 벌레를 몇 번 잡아 줬거든. 그랬더니  그때부터 제비들이 나만 쫓아다니는 것이여.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참는거여. 거위는 집에서 키우는 가축인게 잘 훈련시켜서 마당 구석에 있는 먹이를 잘 찾게  해주는 것이고."

"영달아. 이런 말 해서 너무 미안허다. 양길이가 집을 나갔어. 어마니 찾으러 간다고 개성엘  갔어.  거긴 전쟁턴디. 겁도 없는 자식이 거길 갔당게.  걔를 데려올 사람이 너밖에 없다."

 부탁이여."

양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오른발을 바라본다. 열다섯에 아버지가 남기고 간 가장의 짐을 진 그날부터  영달은  자신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왔다.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그 부탁들을  다 들어주었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영달아.  어머니와 작은 집을 부탁헌다.'

 "자네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일이네."
"소방님.  게믄  요망진 부탁이 있수다."

자신에게 부탁을 한 이들 중에 거절을 당한 사람은 복순이뿐이었다.

"영달아. 부탁이여. 나  데리고 산으로 도망가라. 응? 나는 그런 꼬맹이한테 시집가기 싫어. 나 좀 데리고 산으로 도망가."

"안돼. 복순아. 나는 인생에  빨간 줄 간 사람이여. 우리 아버지가 간도서  뭐허시는지 알지?   너도 태어날 자식도  책임 못 져."


대수한테 시집간  복순이가 셋째를 낳고 들에 나와 일하는 것을 본 영달이 복순이의 손목을 잡고 산으로 무작정 끌고 갔다.

"영달아. 나는 인자  세 아이 어머니여. 난 이제 너랑 도망 못 가. 이 손 놔. 부탁이여."

"안돼. 못 놔. 애들은 아버지가 키우것지. 나랑 가자. 멀리 도망가서 살자. 응."

산에서 하룻밤을 지낸 복순은 영달이 자고 있는 사이에 세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영달은 자신에게 아들을 찾아달라고 하는  복순이의 부탁을 또 거절해야 할 것 같아 목이 메어 온다.

"복순아.  나 사실 수배자여. 잡히면 까막소 갈 것이여. 내가 양길이를 찾으러 갔다가 잡히면  갸 인생에도  빨간 줄이  갈 것이여.  나는 못 가. 한대수한테 가라고 해."

"수배자. 그런 것은 상관없어. 옛날에도 상관없었고. 양길이 찾아오면  나랑 같이 살자.  단 하루라도 같이 살자. 양길이도. 응?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 셋이 같이 살자.   너만 양길이를 데려올 수 있어."

영달은 그제야 양길을 볼 때마다 느꼈던  끈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토방에 앉아 햇볕을 쬐며  손톱을 뜯는  열다섯의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친근함,   약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끌고 들어가 옻독의  증상들을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을 볼 때의 뿌듯함,  이른 아침에 일어나 무거운 가방을 지고 학교를 가는 아이에 향한 애틋함,  며칠 전  폭포를 등지고 앉아  우는 남자에게 느껴지는 동질감. 그것들이 모두  핏줄을 향한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영달은 그날 밤  거위 가족을 원천댁에게 의탁하고 양길을 찾기 집을 나선다.

영달이 양길을 찾으러 가고  얼마  후,   인공기를  앞세운  인민군의 행렬이 연월리를  앞을 지나간다.   방장산을 넘어  장성을 지나  광주로 가기 위해서 이다. 부상병이 더러 끼어있으나  군대의 규모와 군인의 기세에 질린  연월리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당당한 인민군의 얼굴을 바라보다 혀를 내두른다.  

인민군들  사이에  군복을 입은 정애가 상관에게 말을 하고 인사를  한 후 대열을 이탈한다.  그리고 정애의 뒤를 따르던 여자 두 명과 함께  인민군 대열을 구경하는  원천댁을 향해 걸어온다.  얼굴의 흉터가 아니라면  딸이라는 것을 못 믿겠다는  듯  파랗게 질린 원천댁이  정애 얼굴의 흉터만 바라본다.

"정애야. 이게 무슨 일이냐? 니가 왜 인민군복을 입고 온거여.  너 군인이 된거여?"

"엄마. 난 군인이 아니야. 해방군이긴 하지만   대민 교육 담당 선생님이야. 엄마 소원대로 나 진짜 선생님이 되었다고.  인민들과 아이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정식 교사야. 나 천원에 있는 학교에 지원했어.  고향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칠 거야.  인사해. 여기 김의정 선생님, 옆엔 서영희 선생님. 나랑 벽돌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무들,  이제부턴  날 도울 선생님이야."

정애의 얼굴은  뺨을 가로지른 흉터에도  티하나 없이 밝아 보인다.  같이 온  여자들 또한 무척 예의 바르고  정애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진 듯 보인다.

정애는 다음 날부터  두 여자와 같이 천원에  있는 국민학교에서  사상 교육을 하고  퇴근을 하면 집에 돌아오면 원천댁을 도와 집안일을 한다.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과 흉흉한 소문들 그리고 마을마다 인민재판을  구실로  해묵은 원한을 앙갚음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연월리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이곳이 이렇게  안락할 수 있는 이유가 정애 덕분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것을   경계하는 주민들은  모르는 척하고  있다.  정애는  어머니가 계신  연월리가 어떤 사상에도  물들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정애가 돌아온 다음 날,   애야와 정용, 팔월이 사라졌다.  원천댁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인기척이 없는 앞집,  애야의 집에 들아가보니  급하게  사람이 떠난 집안엔   남겨진  살림살이가 주인 노릇을 하듯이 제 멋대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원천댁이  귀화를 찾아가 딸의 행방을 물으니  피난을 떠났다고  했다.  

"예? 피난을 갔다고요. "

"응, 피난 갔네."

"어디로요."

"전쟁을 피헐 수 있는 곳으로 갔것지."

"형님도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

"저한테 말을 못 허신다는 거예요?"

"......"

"형님. 우리 사이가 이런 사이예요?  겨우. 정말 서운허네요."

"미안해. 동생.  모르는 게 나아. 그래서 그려.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 순간  원천댁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뭔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언덕길을 내려오면 울분에 찬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려.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지. 나도 알어. 모르는 게 백번 천 번 낫지.  근디 들켰는디 어쩔 것이여.  아무도 모르게 잘 숨겼어도  들통이 나버린  것을 어쩔 것이여.  이 무당년아.  집도 절도 없이  흉가 얻어놓고  넘 굿이나 하면서 사는  주제에  산에서 데려 온 벙어리 딸년을 화원처럼 꾸며서 살게 헌 게  지가 뭐라도  줄 아나 보네.  감히 무당년이. 쳇."

양길과 영달이  떠난 후  원천댁의  마음은  깨진 거울처럼   와르르 쏟아질 듯 날카롭고   위태롭다.    두 남자는  떠난 지 세 달이나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  조각조각난   심정을  간신히    부여잡고 정애 앞에서 태연한 행동하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살핀다.   귀화의 산 기도가 잦아졌고  독바우댁이  항상  따라가는 것으로 보아  애야 가족과 만일의 가족이 산에 함께 숨어있는 것을  확신하고  배신감에  몸을 파르르 떤다.

더위가 완연히 사그라질 무렵 미국 군대가 인천에 상륙했으며 곧 국군이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돈다.   전라남도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이 다시 방장산을 넘어와서 연월리를 지나 북쪽으로 돌아간다.   몇 달만에  다시 본 인민군들은   남루하고  초라해졌으며  눈에는 비겁함과 살기가  서려있다.   민가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것은 예사이고   먹을 것을 내놓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 중엔  양계장을 하는 정용의 친구,  오 남매의 아버지인  영술도 포함되었다.



정애는 같은 왔던 여자 두 명을 북으로 향하는  군대에  딸려 보내고  자신은  후일을 대비해 연월리에 남겠다고 한다.

"너희들은 북쪽으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내려와.   그게 나을 거야. 너희들은 산 생활 감당 못해.  난 예전에 산에서 지낸 경험이 있어서 괜찮을 거다.  얘들아.  우린 한 몸을 구성하는 세포야. 너희들이 사는게 내가 사는거야.  난 여기 남아 너희들 같은  새로운 세포를 또 만들어야 돼."

두 여자가 북한군을 따라  떠난 뒤   군이 들어왔고  정애는 산으로 들어간다.   전세를 회복한 군은  공산주의에 오염되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찾아내 가차 없이 죽이고  산에 숨은 빨치산을 찾아내 죽이기  위해  토벌대를 조직해  산으로 파견한다.

산은  싸움을 말리는 할머니처럼  능선과 골짜기 사이사이, 등고선 치마 자락에  빨치산과 토벌대, 그리고 피난민을  모두  품고서  서로에게 서로를 들키지 않도록  나무로 바위로  풀로  꽃으로  은폐하였으나 정애는 토벌대에 잡히고 만다.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쳤던  학교 운동장에   정애와   남자 빨치산 세명,   부역자라는 죄명으로  끌려온  여자 둘, 남자 셋이  묶인 채로 죽창을 든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주민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   사람들이 더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죽창을 든 젊은이들은  고함을  치며   사람들을 선동한다.  한때는 모두가 가까운 이웃 들이었건만  가까운 이웃이 아님을 증명하듯   주민들의  돌팔매질은  잔인하고  냉정하다.

정애가  잡혀왔다는 소식을 들은 원천댁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그  뒤를  귀화가 따라온다.  


달려온 원천댁은  죽창을 든 청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정애를 살려달라고 빌며 울다가  운동장 바깥으로 내쳐진다.  원천댁의 뒤를 따라온 귀화가 원천댁을 일으켜주자  원천댁이 귀화의 손을 잡고  죽창 든 청년들 앞으로   나가서  외친다.

"이년이 우리 동네 무당인디. 이년도 빨갱이요. 산에 음식을 가지고 가는 것을 수도 없이 봤어라.   이년 딸은 벙어린디 사실은 들을 줄도 알고 말할 줄도 아는 음흉한 년이어라.  이 년 사위는  군대에 안 갈라고 산에 숨었어라.  이년 사위랑 딸이 어딘지 숨은 지  안당게요. 등진골.  아주 깊은 산중인디
내가 길을 안당게요.  내 딸만 살려주면 내가 빨갱이 열은 더 잡아올 수 있당게요."

원천댁의 억측스런 고발과 귀화를 향한 모함에   광분한 사람들이   원천댁을 향해 외친다.  


"저 년을  죽여라.  저 년도 같이 죽여."   

 근방 사람이라면  귀화의  도움과 보살핌을 안받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이 뻔한데도    귀화를 음해하는 것이 자신들을  기만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순간,   죽기를 각오하고 묶인 채로  떨고 있는  정애가   피투성이 짐승처럼 엄마를 부른다.

"엄마. 엄마. 엄마 아아아. 그러지 말어.  말란 말이여."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은  빨갱이가 엄마를  부르자 군중이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틈에   귀화가   걸어가  핏덩이 정애를  끌어안는다.

 

그러나 이 고장 사람이 아니기에   귀화의 얼굴을 모르는 죽창 든 젊은이가  격앙되었던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다 죽여버려'라고 말하자  한 젊은이가 등에서 소련제  기관총을  꺼내  빨치산들에게,  부역자 죄명을 쓴 이들에게, 정애에게, 귀화에게 쏘아버린다.

제 입으로 '죽여라'를 외쳤던 군중들은   시체더미 앞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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