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이 들어온 뒤, 산에서 내려온 만일은 사나흘에 한번 꼴로 집에 들어간다. 인민군이 주둔했던 시기에 소실된 자료를 찾아 복구하고 무너진 행정 업무를 재개하는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을 하게 된 만일이 자전거를 겨드랑이에 끼고 무너진 다리 옆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자전거를 팽개치고 메마른 하천 바닥으로 내려간다. 끝머리가 쇠젓가락처럼 휜 11월은 바닥이 드러난 냇가에 성마른 삭풍을 내리꽂으며 남은 습기를 앗아가고 있다. 물기를 잃고 흩어져 가는 모래톱을 움켜쥔 채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가 찬바람에 맞으며 스스스스스 마른 곡소리를 낸다. 만일은 마른 갈대숲을 두 손으로 헤쳐가며 망설임 없이 습지 안쪽으로 뛰어들어간다.
"단곡댁!"
젖은 바닥에 얼굴을 들이박고 등에 거문고를 진 단곡댁이 갈대 무덤 사에 엎어져 있다. 만일이 단곡댁을 어깨를 흔든다.
"단... 단... 단곡댁 눈을 떠봐."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단곡댁이 옅게 웃는다.
"흐읏. 드디어 왔구먼."
"어쩌다가... 병원에 갑시다. 내 등에 업힐 수 있것소. 제발 이 놈의 거문고는 등그리에서 제발 내려놓고."
만일이 여자의 등에서 거문고를 거칠게 뜯어내고 훌쩍 둘러업더니 하천에서 벗어나 신작로로 올라온다. 그러자 등에 업힌 단곡댁이 만일의 귀에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등이 이렇게 넓었소. 흣흣. 근디 내 이름은 아시오."
"이 마당에 무슨 이름 타령일까. 다 알고 있소. 언젠가 관에 적어낸 서류에서 봤지."
"내 이름은 송두리요."
만일이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음흠, 송두리, 한번 보면 절대 못 잊을 이름이라."
"부탁이 하나 있는디."
"부탁은 무슨. 그냥 하라고 하면 될 것을."
"몽이 오믄 남원에 가라고 전해주것소. 남원 동편제 전수관, 낙원. 거기가 내 본집이요. 남원 명창 송한나가 내 쌍둥이 언니."
"알것소. 전해 주겠소. 남원의 송한나를 찾아가라고."
"......"
"나도 부탁이 하나 있소. 다음에 올 땐 등에 짊어진 것들 다 내려놓고 오시오."
"고 오 맙소. "
두리는 만일의 등에서 이 생의 마지막 숨에 고맙다는 말을 실어 내쉬고 눈을 감는다.
단곡댁은 자기 안에서 위태롭게 타고 있었던 불이 훅이 꺼지고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본다. 연기를 타고 몸에서 빠져나온 두리는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만져본다. 옻독이 올라 쓰라리고 짓물렀던 부위가 가라앉았고 병든 몸을 숙주로 기생하고 있었던 가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너무나 홀가분하다. 육신에서 벗어나니 신체의 고통, 죽음의 공포, 자식에 향한 그리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거문고를 향한 애증을 모두 합하여도 다섯 돈 육 푼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는다. 저만치 두리의 육신을 등에 업고 울며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얼굴은 치다만 떡판인디 등짝이 저렇게 넓었구먼. 허긴 저 사람 뒷모습을 한 번도 봐준 적이 없었응게. 어쩌자고 저 사람한테 또 짐을 지운 것이여."
그때 등 뒤에 사람이 아닌 뭔가 서있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뒤를 휙 돌아보니 등 뒤에 있는 것이 자신을 따라 돈다. 익숙한 것, 자신의 등에서 자신을 늘 따라다녔던 거문고, 갈대숲에 두고 온 거문고가 전과 같이 두리의 등에 붙어있다. 두리가 두 손을 뒤로하여 업은 아기의 엉덩이를 쓰다듬듯이 거문고를 어루만지다 거문고를 앞으로 돌려 가슴에 끌어안는다. 사모하는 이의 뒷모습을 봐준 적이 없었듯이 등에 진 거문고도 가슴에 안아 본 적이 없었음을 깨닫자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사십여 년의 생 동안 천형처럼 등에 짊어지고 떠돌았으나 앞가슴에 안고 보니 처음부터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참회의 눈물이 속구 친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언니, 언니, 잘못했어. 아버지 내가 잘못했어. 어머니, 형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 살았어."
옛일을 후회하며 소하 하는 송어처럼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흘러내려왔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언니를 부른다.
"언니. 한나 언니.
보고 싶네. 인자 내 얼굴에서 언니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어. 같은 날, 똑같은 얼굴로 한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우린 너무 닮아서 어머니와 아버지 외엔 우릴 못 알아볼 정도였응게. 언젠가 여쭤봤더니 어머니는 내 입술 옆의 점으로 우리를 구분했고 아버지는 우린 목소리가 다르다고 하셨어.
언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와 같은 모습은 아니것지. 언니에게 지금 내 꼴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여.
다 내 잘못이여. 모두 내 타락의 결과여. 용서받을 수 없는 내 죄여. 훔치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쳤으니 바닥을 기어 다녀야 하는 천벌을 받은 것이여. 미안해. 언니.
어쩌다 그런 짓을 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어.
언니와 형부가 결혼을 한해, 안채 마당 한편에 석북색 도화가 만발하고 연못의 황금색 잉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춤을 추는 날이었어. 안채 마루에서 언니와 형부가 마주 보고 정답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형부가 고수를 자청하여 북을 잡고 언니에게 부채를 건네주었단게.
언니는 형부의 부채를 펴서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시작했어. 그날 언니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아는가. 무릉도원에서 시냇물을 타고 세상 구경을 나온 복숭아 꽃잎처럼 가련하고 애처로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언니의 소리에 감동을 해서 울었단게. 얼른 눈물을 훔치며 형부 얼굴을 봤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반려로 삼기 위해 제국을 포기한 제왕처럼 한치 의심 없는 지고지순한 남자의 눈빛이었어.
많은 부부들을 봐왔지. 서로 마음이 변할까 의심허고 다른 이을 경계 허고 복종과 권위를 가장하여 불안함을 가리느라 안절부절. 그러나 언니와 형부는 달랐지. 서로를 향한 사랑을 두려움 없이 진실하게 나타내는 한쌍은 난생처음 봤응게. 나는 은근히 화가 났네. 내 짝을 뺏어간 형부에 대한 질투였는가 형부를 남편으로 둔 언니에 대한 시기였는가. 아님 둘다였는가. 지금도 모르겠네.
언니, 심봉사 기억 헌가? 주구중창 심청전만 부르던 사람. 맨날 수련시간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중늙은이 수련생 말이여. 실력이 하도 안 늘어서 일 년 정도 수련허다가 쫓겨났는데. 허긴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 그 사람을 전수관 수련생으로 들인 것이 나였다는 것을 아는가? 지지리 복도 없는 사람.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디.
날마다 수 많이 사람들이 아버지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전수관 담 밖에 며칠씩 줄을 설 때였어. 그 엄혹한 시절에도 어디서 구했는가 온갖 귀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서 말이여.
그깟 소리 따위를 배우겠다고 말여.
그중에 심봉사가 있었네. 중늙은이가 오래 줄을 서는 것이 안쓰러워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왜 소리를 배우려고 하냐고 물었어. 그 사람은 말하길 살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데 죽기 전에 자기 소리가 좋지 못한 이유를 꼭 알고 싶다고 했어. 똥물을 퍼먹어도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을 해도 안된다고 하면서 어린 내 앞에서 우는 것이여. 그 사람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서 아버지를 졸라 그 사람을 수련생으로 들이게 했네
일 년 정도 지나 어린 수련생들 중에서 할아버지 뻘 되는 심봉사가 눈을 반짝이며 창 연습을 하는 모습을 봤어. 가슴이 벅차오르고 뭉클하더구만. 얼마 후에 그 사람이 경연 시간에 창을 하는 것을 봤어. 타고난 목소리는 영 시원치 않은데 숨은 짧고 감정은 넘쳐흘러 질척 질척.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까지 흘리며 심봉사 타령을 하드만.
'아버지라니. 아버지라니. 누가 날더러 아버지래여.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 외딸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우금수삼년이 되었는데 누가 날 더러 아버지래여. 켁켁켁. 헤엑...'
그 사람이 짧은 숨을 너무 뽑아 써서 기침을 토해냈어. 창을 멈추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지. 근엄한 아버지까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지고 수련생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울고 싶었는데 그 사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그 자리에 그냥 서있더구먼. 아버지가 웃음을 참느라 몇 번이라 침을 삼킨 후에 겨우 말씀하셨지.
"소질에 노력을 더하면 예술이 되나 고집에 노력을 더하면 소병(笑柄)이 되는 것을 아시오. 이러다 우리 모두 소병에 걸릴 지경이네. 그만하면 되었소. 강연료는 돌려줄 것이니 이제 그만 생업으로 돌아가시오."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 하지만 심봉사는 몇 달이 지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 스승과 수련생들에게 외면을 당하면서도 주위를 뱅뱅 돌며 득음을 하지 못하는 원인을 알고자 했지.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고도 눈을 뜨지 못한 심봉사처럼 말이여. 결국 그 사람은 쫓겨났네.
몇 달인가 지나서 술을 먹고 길에 쓰러져 있는 심봉사를 봤어. 이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네. 그 입성 좋았던 사람이 거지꼴을 하고 길바닥에 누운 채로 허공에 팔을 휘저어가며 심청전을 부르고 있는 것이여. 참 여전하구나 싶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어쩐지 그 목소리가 이전과 자못 달라져 있었어. 깊은 울림이 생겼다고나 헐까. 궁금해서 말을 시켜보았지.
"심봉사. 어째 여기서 이러고 계시오? 집에 안 가셨소? 목소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몇 달 사이에?"
그 사람이 눈을 뜨고 술 냄새가 펄펄 나는 입으로 나한테 술주정을 하는 것이여.
"얘야. 미안허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소리 허겠다고 안헐텐게 돌아와라. 니가 왜 죽긴 왜 죽어. 늙은 내가 죽어야지. 임자.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소리 같은 것은 허지 안 컸소. 돌아오시오. 임자. 너! 너 때문에 내가 망한 거여. 이년. 이 뱀 같은 년. 사람을 속여 먹는 독사 같은 년. 누구든지 득음을 할 수 있다면서. 네 이년."
악귀처럼 들러붙는 그 이를 겨우 떼어내고 집으로 달렸지. 너무 무서웠네. 그 사람은 소리 때문에 인생을 망친 거여. 내가 부추겼지. 득음에 미쳐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이에 딸이 죽고 아내는 도망을 간 거여. 그깟 소리가 뭐라고.
집 쪽으로 달려오니 멀리서부터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려왔어. 어머니가 누각에서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높은 담장을 타고 넘어 길거리로 나온 것이었지. 집 밖 담벼락에 서서 거문고 가락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켰지.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심봉사도 자식과 아내를 잃고 울림 있는 소리를 갖게 되지 않았는가. 잔인하지만 그것이 예술인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얼굴을 바라봐서 나도 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봤네. 굶주리고 병들어 기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 복락이 넘쳐흐르는 낙원에서 잠시 외출한 나를 노려보고 있었어.
아버지가 세운 담장 안에서 내가 누려온 것들은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심봉사 같은 이들에게서 짜낸 기름을 힘 있는 자들에게 바치고 손에 묻은 것을 핥아먹는 것이었어. 부끄러웠어
그래서 무너뜨리고 싶었네. 아버지께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낙원의 명성과 어머니의 고결함 , 언니의 소리와 형부의 순정까지 모두.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다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이 나를 병들게 했네. 밤새 앓고 일어나면 아침 이부자리 안에 내가 들어있었어. 그것은 내 허물이었네. 한 겹 한 겹 껍데기를 벗을 때마다 뱀으로 변해갔어. 배암 말이여. 심봉사가 나의 본모습을 알아본 것이지.
어느 날 밤, 자다가 눈을 뜨니 내가 구렁이만큼 큰 뱀으로 변해있었어. 스르르 방을 빠져나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쥐구멍이란 쥐구멍을 다 찾아내서 새끼 밴 쥐까지 모조리 잡아먹고 언니로 둔갑해서 형부가 주무시는 사랑채에 들었어. 형부는 사랑에 눈이 멀어 나를 못 알아봤어. 늦은 시간 남편을 찾아온 아내를 기뻐하며 안았을 뿐. 나는 그것이 더러운 꿈인 줄로 알았네.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어.
처음엔 눈앞이 깜깜했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우리 집안은 나로 인해 망할 것이다. 아버지의 명망은 땅으로 떨어져 이 동네 저 동네를 구르며 발에 치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고결한 어머니는 대를 잇는 아들 대신에 계집 쌍둥이 낳은 것으로도 모자라 화냥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작은 딸을 방조하여 큰 딸의 팔자까지 망친 불결한 여인이 될 것이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언니의 소리는 처량함과 청승으로 오염될 것이다. 형부는 처제를 범한 변태의 오물을 뒤집어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여기서 풀려나 자유로워지겠지. 예술 따윈 없는 세상에서 내 맘대로 살겠지. 아마 오래 살지 못하고 죽겠지. 아암. 그렇게 되겠지. 너희들은 살아가는 길에서 예술과 낭만을 찾겠지만 나의 예술과 낭만은 죽어가는 길 핀 저승꽃이다.
탈옥하는 길에 어머니의 거문고를 도둑질해서 등에 지고 나왔네. 왜 그것을 가지고 나왔는가 모르것어. 그때 거문고을 안 갖고 나왔으면 모두 내 계획대로 되었을까.
집을 나와 신이 해지고 옷이 바랠 때까지 세상을 돌아다니며 빌어 먹었어. 그런데 빌어먹으면 빌어먹을수록 더 배가 고파져서 거문고를 타서 밥을 벌어먹었어. 빌어먹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졌네. 나는 배고픔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얼마 간을 돌아다니다가 뱃속에 아이가 들었다는 것이 기억났어. 독인 줄로 알고 품었던 아이가 내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나고 있었단 말이여. 배는 무섭게 불러오고 겨울이 코 앞에 다가왔어. 소원대로 길가에서 딱 죽기에 좋은 날이었네.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는데 어떤 이가 나를 자전거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갔어. 실려가 보니 가난한 산동네에서 홀어머니와 남동생을 겨우 건사하며 살아가는 그중 가난한 청년 집이었네.
그 사람 집에 가서 눕혀지는 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잃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산골 아낙이 아들이 데리고 온 나를 보고 혼비백산을 하는 것이여.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어. 근디 말이여. 그 집은 너무 따뜻했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온기였어. 실상 방바닥은 그렇게 따뜻하지도 않았는디 말이여.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방구들을 땃땃허게 데우고 살겠는가. 그런디도 거기 누운 게 웅크리고 있던 뱃속의 아기가 기지개를 켜고 발길질을 했어. 그 순간 살고 싶어 졌네. 땅속이든 산속이든 깊이 숨어 아기를 넣아 기르고 싶어진 것이여. 내가 방금 전에 비웃었던 산골 아낙처럼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겨버린 것이여.
그 후론 아이를 어떻게 낳아 기를까만 궁리했어. 거문고를 처분해 곡식을 사서 아기를 낳고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겨울을 지냈지. 봄부터는 아기를 업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밥을 벌어먹고 젖을 내어 아이에게 빨리다가 손에 묻은 내 젖은 핥으며 배고픔을 견뎠네. 이듬해 겨울 형부가 우리를 찾아왔어. 형부는 그런 사람이었어. 자기 인생을 망친 여자와 자식을 찾아내 돌봐주는 사람. 그런 게 아버지가 형부를 사위로 삼았겠지. 형부는 언니와 헤어지고 전수관을 나와서 오부리가 되었다고 했어. 잔칫집이든 기생집이든 딴따라 장단을 맞추며 창을 헌다고. 남원 동편제 전수자가 말여.
가끔 형부가 나를 애절하게 바라봤어. 그 시선이 얼마나 뜨거웠는가 얼굴이 따가웠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언니를 보는 눈빛이었어. 그리고 나를 알아보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변했지. 그것이 미움이었는가 후회였는가 언니를 향한 그리움이었는가는 몰라. 형부는 나한테 자기 마음 한 자락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닌게.
몽이는 말 문이 트이면서부터 말을 더듬었네. 어린것이 재잘재잘 끝도 없이 떠들며 말을 배워야 할 때 말이여. 저도 더듬는 것이 부끄러웠는가 말문을 닫아버렸어. 그저 입만 트였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허고 애를 태우는데 애기가 어느 날부터 창을 허는 것이여.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한번 들은 곡조를 혼자서 읊조리고 다듬어 하나의 곡으로 뽑아내는 것이여. 그리고 창을 헐 대면 말을 안 더듬었네. 그런디 어찌 그것을 말리겠는가. 처음엔 형부도 애기가 창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 허지 않다가 결국 가르치더라고. 인자 어려운 고비 다 넘기고 좀 살겠다 싶을 때 형부가 몽이를 데리고 떠났네. 내가 버린 거문고를 찾아다 주고 몽이를 데려갔어. 그리고 오 년이나 소식이 없네. 형부도 몽이도.
그때부턴 할 수 없이 거문고를 다시 탔어. 어린아이를 키우듯이 거문고를 한시도 떨어뜨리지 않고. 그리고 앉을자리만 있으면 장터든 잔칫집이든 거문고를 탔어. 그런데 말여. 그놈의 거문고 줄에 술대를 올려놓으면 가느다란 여섯 줄이 쉼도 끝도 없이 내 죄를 토설하는 것이여. 심봉사 술주정하듯이 말여. 듣기가 괴로워서 안 허고 싶었지만 내가 달리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올봄에 장터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데 낯선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네.
"송 선생. 여기서 뭐 하는 것이오? "
"......"
"왜 이러고 계시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내 얼굴빛이 변하자 존경과 의아함이 서린 말투가 순식간에 경멸에 찬 목소리로 변하여 내뱉듯이.
"혹시 송 선생의 동생인가? 쳇, 언니는 남원 제일 명창인데 동생은 장터에서 밥타령을 하는 비렁뱅이가 되다니. 인과응보다. 거지가 거문고는 무슨... 깨진 바가지 하나면 적당하지. 동편제에 똥물을 끼얹고도 이 짓을 하고 사나. 밥은 목구멍에 밥은 들어가나 부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에 가보쇼. 송 선생이 오래 찾고 있다던데. 밸도 없이. 캭. 퉷튓퉷."
언니. 내가 그때 연주하던 곡이 하필 각설이 밥타령이었소. 귀신같은 사람. 그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 후론 장터에 나가지 못했네, 옻독이 올랐거든. 온몸이 무섭게 부어오르고 혓바닥 끝까지 간지라서 자근자근 혀를 깨물며 잠을 잤네. 피가 나도록 긁어도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았어. 어느 날은 자다 일어나 보니 내가 흙바닥에 얼굴을 비벼대고 있었어. 가려움 때문이었는가. 수치심 때문이었는가. 흉한 내 얼굴 때문이었는가. 그때부턴 거울을 못 봤네. 내가 뭔 낯으로 거울에 비친 언니 얼굴을 볼 수가 있겠는가.
언니. 한나언니. 어떻게 내 죄를 씻을까. 이제라도 훔친 것을 돌려주면 될까. 받아주것는가. 언니가 몽이 어머니가 되어 주겠는가. '
남원에 도착한 두리가 낙원 대문 밖에 서있다. 대문간 처마 아래 현판에 쓰인 낙원이라는 하얀 글씨 위에 빨간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담장은 군데군데 무너져있다. 커다란 두 짝 대문은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채로 경첩에 달려 끼 억 끼 억 불협화음을 낸다. 담장에 쓰인 붉은 글자들, '공산당을 죽여라', '부역자', '빨갱이' 이가 겁에 질린 채로 피를 질질 흘리며 걸려있다. 마을의 다른 집들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낙원만이 홀로 전쟁을 겪은 듯 얻어터져 깨어져있다.
두리가 소리 없는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조용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팔도의 소리꾼들과 구경꾼들 그리고 소리꾼들과 구경꾼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 참견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넓은 마당엔 모닥불을 피운 흔적만이 화장터처럼 남아있다. 문을 열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는 본채에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다. 언니가 있는 안채에도 아무도 없다. 오색의 잉어들이 서로의 몸을 스치며 탐닉했던 연못엔 세력권을 지키고자 자기 둘레에 끊임없이 원을 그리는 소금쟁이가 녹조 위에 가득하다. 연못 옆, 복숭아나무는 싹둑 베어져 한 뼘 남짓 지름의 밑동이가 검게 썩어가고 있다.
'다들 어디로 갔는가.'
그토록 무너뜨리고 싶었던 낙원, 낙원이 파괴되면 그 안에 살았던 존재들도 증발한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두리는 사람을 찾다 거문고를 꼭 안고 아무 형체도 없이 망연자실하게 서서 붕괴된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집에서 제일 높은 본채 지붕에 올라가 용마루 끝 치미에 걸터앉아 어두워질 때까지 집 전체를 조망하다 달이 뜬 뒤에 거문고를 탄다.
예술에 취한 이들의 흥겨운 잔치 또 잔치, 향기로운 술이 흐르고 기름진 고기가 질겅대며 씹히는 연회, 재능과 실력을 갖춘 아름다운 예술인들과 추종자들, 날 선 칼처럼 공간과 시간을 단숨에 찢어버리는 음악들, 탄성, 갈채, 한숨, 박수 그리고 기절하는 음성, 웅성거림, 침묵, 계속되는 경연들, 긴장한 이들의 동동거림과 초조함, 실패와 성공, 그리고 또 잔치 또 잔치, 잔치를 위한 착취, 타락과 파괴, 이어지는 오랜 고요, 고요를 깨는 전쟁, 살인, 폐허 속의 귀곡성, 이 소리를 누가 이어받나, 내 소리를 받아갈 사람 없소. 거기 누구 없소.
두리의 거문고 연주가 끝나자 그 소리를 이어받기라도 하듯이 괴괴한 집 안 어딘가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노랫소리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사랑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내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를 떼 뜨리고 강릉백청을 따르르르르 부어
씨는 발라 버리고 붉은 점 움푹 떠 반간 진수 먹으랴느냐
아니 그것도 싫소 그러면 무엇을 먹으랴느냐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당동지 지루 허니
외가지 당참외 먹으랴느냐 아니 그것도 싫소
그러면 니 무엇 먹으랴느냐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앵도를 주랴 포도를 주랴 귤병 사탕 혜화당을 주랴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앙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아매도 내 사랑아'
두리가 온 집안을 다니며 노랫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다니다 형부의 방, 사랑채 방문 앞에 우뚝 멈춘다. 다닥다닥 창호지를 기워붙인 영창에 홀로 사랑가를 부르는 여자의 그림자가 어려있다. 두리가 문고리를 잡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검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낸 뒤에 방 안을 훔쳐본다. 눈물 자국 가득한 양초가 밝힌 초라한 방에서 한나가 남편의 부채를 손에 쥐고 거울을 보며 사랑가를 부르고 있다. 부채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수줍은 듯 얼굴을 가렸다가 요염하게 눈을 치켜떴다 새침하게 내리깔며 웃는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 자기 귀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다. 파괴된 낙원에서 자기 안의 낙원을 발견했다는 듯이 한나가 사랑 노래를 하고 있다.
그 모습에 현기증을 느낀 두리는 이마에 손을 얹고 기둥을 짚으며 툇마루에 주저앉는다.
그때 다리를 질질 끌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늙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는다.
"선생님. 선생님. 송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노래를 멈춘 한나가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와 자신을 찾는 늙은 목소리에 스스럼없이 대답한다,
"여기 있습니다. 심 선생님. 저 사랑채에 있어요."
늙은 남자가 사랑채로 걸어와 두 무릎을 짚으며 툇마루, 두리 바로 옆에 앉는다.
"왜 여기 계셨어라? 송 선생님."
"옛날 생각이 나서요."
"송 선생님도 인자 나이를 잡수시는가 보네요. 옛날 생각을 허시는 것을 본 게요. 송 선생님, 얼마 전에 풍류방에서 공연을 허다가 삼 장사 김 씨를 만났는디요. 올봄에, 전쟁 터지기 전에 정읍 장에서 동생분을 봤대요."
"네? 두리가 살아있어요? 자세히 좀."
"네. 삼 장사가 진작에 알려드렸어야 했는디 시절이 시절이기도 하고. 동생 분이 너무 미워서 이야기하기가 싫었다고 허대요. 동편제에 똥칠을 하고 나가 얼마나 잘 되는가 힜더니 비렁뱅이 신세 되었다고 허면서. 그 재주로..."
"두리가 아직 거문고를 헌다고요?"
"예. 선생님. 정읍 장 바닥에 처음 듣는 거문고 곡조가 깔려서 홀린 듯이 따라갔다고 허드만요. 거문고가 '나는 아무것도 없는 각설이요. 외롭고 배고픈 사람이요. 노래하는 재주 외엔 아무것도 없소. 내 소리를 들어주오. 그리고 한 푼 줍시오'라고 말허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고 허드만요. 그리서 연주자 얼굴을 봤더니 송 선생님이었다고. 그리서 언니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긴 했다는디."
"내일 정읍장에 가볼게요."
"제가 벌써 다녀왔지라. 장사허는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디 올봄부터 안 나온다고 허드만요. 멀리 간 것 같다고 허면서. 그리도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아셨을 텐데 언젠가는 오시것지요."
"그럴까요? 돌아올까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을 알까요?
"그러믄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듯 그분도 우리 생각을 허시겠지요. 저도 그분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소리 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저냥 살다 죽었을 것인디. 내 평생의 은인인디. 내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인디. 죽기 전에 만나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인디."
낮고 음산한 거문고 귀곡성이 낙원 구석구석에 울려 퍼진다.
누가 이 말을 들어줄까.
내 소리 들어줄 사람 있소.
거기 누구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