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로 Oct 17. 2023

환자분 다른 병원 안 가시면 안 되나요

“교수님 제가 이사 가게 되었어요. 다른 병원 가게 소견서 좀 써주세요”


어떤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는 환자들은 담당교수에게 어렵게 꺼내는 경우도 많다. 가짜 교수라도 대학병원 교수는 권위가 있다. 괜히 지금 교수를 믿지 못해서 다른 병원의 진짜 교수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도 보았다. 앞으로 다시 보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소견서 혹은 의뢰서를 대충 써주지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사실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절대 불쾌하지 않다. 설사 나의 진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환자들도 절대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좀 치료가 잘 안 되거나 말을 잘 따르지 않는 환자들 같은 경우는 ‘다른 병원으로 좀 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또한 암 진단이나 치료 등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라면 더 명의에게 한번 더 진찰받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백 퍼센트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래도 진료 중에 소견서 써주라는 말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아니 불쾌하지 않는데 왜 싫어하나고.. 그것은 소견서 쓰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담당의사로서 내 환자가 최고의 치료를 받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설사 내가 아니더라도 그 환자가 좋은 의사를 만나서 더 좋은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게다가 환자 하나하나가 떠난다고 매출에 별 지장도 없다. 대다수의 우리나라 대학병원은 항상 환자가 많다. 문제는..  소견서 써주는 것이 힘들다...



이 환자에게 할당된 3분 30초 안에 소견서도 작성해야 한다. 들어오자마자 소견서 작성해 달라는 환자는 드물다. 보통 자기 물어볼 것 다 물어보고 설명 다 듣고 이제 다음 환자 불러야겠구나 하는 즈음에 소견서 써달라고 한다. 일반적인 보험회사 제출용 소견서나 통원확인서는 그냥 클릭 몇 번 하면 출력되지만 타 병원으로 보내는 전원 소견서나 진료의뢰서는 이후치료를 위해 의사의 내 소견과 환자의 치료과정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지가 않다.


사실 그냥 간단하게 써줘도 된다. 앞으로 볼 일이 없는 환자라면 그냥 한 줄만 써도 된다. 실제로 의뢰서에 몇 글자만 달랑 써서 오는 환자들도 매우 많다. 하지만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성의껏 써줘야지


나는 그래도 의무기록, 즉 차트를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하는 의사라고 자부한다. 평소에 환자에 대한 의무기록을 잘 정리해 두면 그래도 이렇게 소견서나 의뢰서를 작성할 때 시간이 많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다른 교수가 오랫동안 보다가 나에게 넘어온 경우 혹은 지나치게 병이 여러 가지로 복잡한 경우 의뢰서를 작성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뒤에 환자들이 밀린다. 간혹 외국으로 이민 가니 영어로 작성해 달라고 하면 더 골치가 아프다. 짧은 영어로 작문까지 해야 하는 머리 아픈 상황이다.


요새는 거의 없지만 노교수님들 중에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계셨다. 독수리 타법까지는 아니지만 굉장히 타자가 느린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의무기록 작성이 미흡했다. 그리고 이 분들에게 받는 소견서는 거의 백지 수준인 경우도 많았다. (과거에는 그래서 밑에서 부리는 전공의를 불러서 대신 쓰게 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다 떼어가면 되지 않냐고 하는데 나조차도 타 병원에서 두꺼운 의무기록을 철해서 가져와도 짧은 진료시간 중에 다 읽을 수가 없다. 그럴 때 그 담당의사의 소견서만 붙잡고 자세히 읽는다. 의사들도 그 모든 검사들을 다 참고하면서 치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핵심적인 치료 내용만 파악하면 된다. 그래서 소견서가 중요하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시간을 줄이고자 어떤 교수들은 진료실 앞에 이렇게 써 놓았다고 한다. ‘전원 소견서가 필요할 경우 진료 전에 미리 말씀 주시길 바랍니다’. 나도 이렇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내가 살면서 봐온 의뢰서 중 가장 훌륭했던 의뢰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병원의 레지던트 선생님이 작성해서 보내온 것이었다. 환자에 대한 자세한 치료 기록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새삼 최고의 병원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분명 이렇게 자세히 안 적으면 위의 교수들에게 혼났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위에서 혼내줄 사람 없는 가짜 교수에게 전원 소견서는 정말 작성하기 싫은 일이다.


이전 06화 병원 응급실에서 오지 마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