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이 김뿌듯에게 미치는 영향
우리 학교는 행사가 참 많았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건 체육행사였다. 해마다 청명가족 마라톤 대회를 열었는데 청명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참여해야 했다. 여기저기 볼멘소리가 나오고 싫어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 행사를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항상 혼자 마실 다니던 절로 향하는 길. 그 길을 친구들과 함께 달릴 수 있다니!’
숨이 턱 끝까지 차서 숨이 가빠오는 그 고통을 은근히 즐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거지 터지지는 않는다. 단거리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시던 나에게 오래 달리기는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였다. 운동은 자신의 인내력을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힘든 숨을 참아가며 한 명 두 명 친구들을 제치는 그 기분이 참 좋았다. 부모님이나 누구의 도움 없이 달리는 그 순간엔 오로지 나로서의 존엄이 빛을 발하는 느낌이랄까. 달리기는 나에게 참 공평한 운동이었다. 오로지 내 두 발로 땅을 힘차게 내딛는 그 순간이 나에게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렇게 너의 두 발로 힘차게 세상을 살아나가라고, 이것 보라고 너 잘하고 있다고! 심지어 너에겐 능력도 있다고’
내가 뛰는 모습을 눈여겨보신 분이 계셨다. 우리 학교는 여자 유도부가 있는 학교였는데, 유도를 전공하셨던 여자 체육선생님께서,
“김뿌듯, 너 잘 뛰던데! 육상대회 나가자.”
“네!”
그 이후로 체육시간엔 육상대회를 준비하는 아이들과 아닌 아이들로 나뉘어 연습을 했다. 한 두 달 정도 연습을 했지만, 선생님의 코칭은 없었다. 각개전투였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나는 혼자서 독학을 했다. 출발 연습을 하고, 운동장을 뛰고 또 뛰었다.
왜 중요한 날들은 항상 겹치는 것일까? 생물학적 여성인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날과 겹쳐버린 것이다.
“선생님 저 생리 터졌어요. 어떡해요?”
“원래 여자가 생리가 터지면 더 몸이 활발해지는 거야. 괜찮아 참고 뛰어. 선수가 대회날짜 골라가며 뛸 수 있냐?”
“네”
나는 그날 신기한 경험을 했다. 출발 직전까지 그렇게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던 고통은 출발 총성과 함께 사라졌다. 여주군공설운동장 한 바퀴인 800미터를 달렸다.
끝이 있는 힘듦은 견딜 수 있다. 어려운 건 끝이 없는 힘듦이다.
나는 800미터를 출전한 학생 중에 당당히 1등을 했다. 역시 사람이 마음먹으면 안 되는 것은 없다. 그 이후로도 나는 육상대회에서 내 존재감을 뽐낼 수 있었다.
나의 중학교 생활은 참 바빴다. 우리 학교는 체육행사뿐만 아니라 과학 행사도 많이 개최했다. 우리 때 유행했던 행사는 모형항공기 만들기였다. 나는 태생이 차분한 성격이 못돼서 못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모형항공기 만들기는 재미있었다. 지금처럼 공정한 경쟁을 위해 학교에서 하는 대회가 아니라, 집에서 만들어 와서 학교에서 날리는 형식의 대회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내가 하는 게 속이 더 편했다. 사실 도와주려고 했어도 극구 반대했다. 내 실력이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사‘라는 문구점에서 글라이더 재료를 샀다. 할머니 라이터를 이용해 뼈대를 구부리고 설명서에 따라 조립을 했다.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뼈대 위에 종이를 붙이는 작업이다. 두세 시간을 꼬박 집중해 만들었다.
드디어 대회날. 친구들의 글라이더와 고무 동력기가 교실에 모여있었는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빠나 아빠가 있는 친구들의 글라이더가 나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나처럼 기본재료를 이용하기보다는 색색의 종이와 다양한 구조로 튜닝(?)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나만 순수하게 내 실력으로 한 느낌이었다.
‘아빠나 오빠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열등감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저렇게 화려한 글라이더들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연습이다. 나는 점심을 굶고 글라이더 대회가 열릴 육교 위로 올라갔다. 내 글라이더를 시험운행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글라이더가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하는 순간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돌풍이 불어 그대로 고꾸라졌다. 내 글라이더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오른쪽 날개에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가 났다.
절망.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놀란 마음을 해서 과학 선생님께 갔지만, 돌아오는 건 핀잔이었다.
“대회 못 나가겠네....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잖아?”
마음이 아프셔서 한 말씀이겠지만, 어찌나 쓰리고 아프던지..
'가만히 있어서 중간 할 바에는 안하지!!!'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만들고 준비한 대회인데...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
내 글라이더 오른쪽에 세로로 난 큰 상처를 해결해야 했다. 생각이라는 걸 열심히 했다. 문득 물풀이 생각났다. 물풀을 여러 번 쭉 짜서 날개의 상처를 메꿨다. 한쪽에만 하면 무게 중심이 맞지 않기 때문에 왼쪽 날개에도 최대한 동일한 양 동일한 위치에 물풀을 발랐다. 보기에는 형편없는 글라이더였지만.. 부상병이라고 해서 전쟁에서 꼭 지는 건 아니지 않나?
드디어 대회의 시간, 실에 글라이더를 끼우고 열심히 달려 최고점으로 날게 했다. 그 지점에 연결된 고리를 푸는 순간 내 글라이더는 하늘을 훨훨 날았다. 그 어떤 동력도 없이 순수한 자신의 날개로. 마지막까지 날고 있었던 두 개의 글라이더 중 하나는 이순형, 하나는 내 것이었다. 부상을 입고도 내 글라이더는 최선을 다해 날아줬다. 정확하게는 순형이 오빠가 만든 글라이더를 내가 이겼다. 과학 선생님의 말이 보기 좋게 틀렸다. 선생님의 말이라고 늘 맞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때의 뿌듯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최고의 튜닝은 순정이야!
제가 선생님이지만, 오늘의 글은 좀 도전적이네요.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읽어주고 공감할 때 큰 힘을 얻지만, 그 보다 저 스스로를 치유하는 힘이 강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다가올 가을을 기다리며 올해 마지막 여름을 건강히 보내셔요. 오늘도 그렇듯,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