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가까이 끙끙 앓았다가 오늘에서야 회복의 조짐이 느껴졌다. 작년 12월 15일 아들의 대입 수시 합격자 발표날부터 회사의 인사이동 발표가 난 최근까지 내 마음속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오다가 이번 주 화요일에 이르러서는 두통과 코감기, 불면, 몸살로 몸속의 화가 터지고야 말았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강도 높은 몸살을 앓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회복이 느껴지니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서 오늘은 남편과 함께 아침 일찍 마트에서 장도 보고 을숙도로 드라이브도 다녀왔다.
아들 k의 대입 수시 원서를 접수하면서 6장 중 1장만 빼고는 다섯 군데 모두 지나친 소신지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지원하고자 계획하는 학교와 학과를 정리해서 담임선생님께 의견을 여쭤보니 한 곳 빼고는 대체적으로 소신지원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듣기도 했다. '두어 곳 정도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었나.' 하는 생각과 좀 더 세밀한 분석으로 아이의 진학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런데 웬걸! 작년 12월 15일 대입수시 최초 합격자 발표에서 아들은 어느 한 곳도 최초합격이 안 되었다. 아들과 남편,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그날부터 마지막 발표가 있는 12월 28일까지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나마 수시 2차 추가 발표에서 두 곳에 합격하긴 했지만 아들은 예비 4번으로 마지막 3차 추가 합격 발표까지 기다린 한 곳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학과는 예비 3번까지 추가 합격을 마무리했기에 아들은 합격의 기쁨보다는 본인의 예비 번호 앞에서 끝나버린 아쉬움이 더 커져버렸다. 나와 남편도 아쉬움은 있었지만 아들이 겪고 있는 진통을 지켜보는 것도 부모로서 성숙하게 감내해야 할 몫이었음을 한 걸음 물러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다.
나는 왜 이리도 소심할까.
아이의 마음을 잘 이해해 보려고, 정서적으로 윤택한 사람으로 키워 보고 싶어서 그 방법을 알고자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에 신입생으로 입학해서 4년을 쉼 없이 공부하기도 했었다. 편입이 아닌 신입생 입학을 한 이유는 4년 학부 과정을 차근히 밟으며 전공과목을 다 섭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라는 동기가 나로 하여금 공부를 시작하게 했지만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학은 나를 위한 공부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퍼즐을 맞추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공과목은 다 재미있었다. 일과 가정과 학습을 병행하는 육체적 힘듦은 있었지만 한 학기, 한 학기 전공과목을 이수할 때마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의 캐릭터, 타인의 언행, 친정 식구들의 생각들에 대하여 막연하게나마 "왜"그러한지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교육학과를 선택하고 공부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늘 칭찬해 왔다. 졸업하고 2년이 지난 지금, 약력이 다 된 것일까. 난 늘 소심함의 연속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1월 3일 수요일, 회사에서는 인사이동 발표가 났다. 나의 경우 소속 이동은 없었지만 업무의 변화가 있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도 그랬다. 지점 이동이 있었고, 업무는 이전 지점에서 하던 업무를 그대로 맡게 되었는데 인사이동 발표가 난 그날부터 새 지점으로 출근하기 전 날까지 꽤나 긴장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 "내가 여기서 경력이 얼만데"하면서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태연한 척하는 내 겉모습과 속은 상반된 대비 그 자체였다.
"그래! 경력이 얼만데!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오늘 아침, 제법 개운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불과 한 달 전의 나는 주말에도 새벽 5시 기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책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주말을 시작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에서 생각해 보니 그 또한 아들의 수험생활을 지켜보며 내가 가졌던 긴장의 형태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기고 남편과 나는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둘이서 바람 쐬러 나가게 되었다.
후배가 추천해 준 을숙도의 카페로 가보았다. 10시 오픈 시각에 맞춰 도착했더니 주차장은 이미 많은 차들로 주차되어 있었고, 주문카운터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 식사를 안 한 우리는 1인 1빵을 하자고 하면서 각자가 먹고 싶은 빵으로 하나씩, 커피 한 잔씩 주문해서 햇볕이 잘 드는 3층에 자리를 했다.
"j 씨, 그동안 아들 뒷바라지 한다고 애썼어요. 발표 기다린다고 계속 긴장했을 텐데, 끝나자 인사이동으로 자기가 좀 예민해져서 아팠던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어요. 자기는 인사이동 때마다 좀 예민해지더라."
남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본다.
이제 뭐든 연륜 있게 바라봐도 괜찮을 나이다. 취직을 걱정했던 스무 살부터 또 스물두 살부터 지금까지 28년째 직장 생활하면서 내가 가졌던 불안이 쓸모는 있었나.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자. 상황이 부딪히면 그때 생각하자.
또 잊게 되겠지만 이렇게 마음에 새기는 횟수가 많아지면 정말 새겨져서 나의 마음을 지켜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