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예닉은 우리에게 그의 부모님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은 원래 프라하에 사시지만 가까운 곳 별장에도 자주 머무시니 그곳에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매우 재밌는 분이시라며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에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병원에 가셔야 하는 일이 생겨 현재 프라하에 계신다는 소식에 우리는 부모님이 안 계신 빈 별장으로 출발했다.
사실 우리가 체코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트레일을 걸으며 숲 속 한가운데 있는 집들을 보며,
'왜 이런 깊은 숲 속에 커다란 집이 왜 있는 걸까? 누가 짓고 사는 걸까? 과연 집의 내부는 어떨까?'
하는 이런 궁금증을 품고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우리의 호기심을 해결할 기회가 되었다.
저녁으로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다는 예닉의 말에 고기와 야채, 그리고 치즈와 빵을 준비해 떠나기로 했다.
약 사십여분 떨어져 있는 조그만 마을, 그 마을에서 약 10여분 가량 나무 빼곡한 숲 길을 운전해 가니 숲 속 너른 땅에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진 멋진 별장이 드디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리니 울창한 나무들과 새소리가 반겨주었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절로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바람은 상쾌했고, 공기는 맑았다.
나무가 빼곡히 우거진 숲 속에 오로지 커다란 집 한 채.
집을 둘러싸고 있는 앞과 뒤의 너른 정원에는 잘 깎인 푹신한 잔디, 정성스럽게 가꾼 다양한 나무들과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어 정원이 알록달록하다.
심지어 조그마한 연못까지 있다.
80대 노부부가 가꾼 집과 정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노부부의 손길 하나하나가 모든 곳에 정성이 스며있음을 느낀다.
한참을 멍하니 숲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 후 예닉을 따라 집안 내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의사로 함께 찍은 가족사진들이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어 구경하다 보니 1800년대부터 짓고 살아온 이 집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곳에 사셨다는 이 집을 지금은 부모가 물려받아 이용하고 있고 언젠가는 예닉이 또 물려받겠지.
예닉은 언젠가 이 집을 에어비앤비로 운영을 할 거라는데... ㅎㅎ
그럼 바로 우리가 예약을 해야지... ㅎㅎ
그런데 집이 넓다 보니 방과 거실이 몇 개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집 내부가 마치 미로와 같다. 게다가 위층에도 거실과 방이 있다 보니 방의 개수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방마다의 독특한 인테리어로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 가늠할 수는 있었다.
예쁜 뜨개질과 수예 소품들이 많은 귀여운 방은 예닉의 어머님이 사용하는 방이었고 책들과 조그마한 연장들이 놓인 방은 아버지의 방이었다.
2층 넓은 방에 나무 목공예품들과 해먹이 걸려있는 방은 예닉의 가족이 오면 묵는 방이라고 한다.
다른 방들도 특색 있는 사진들과 그림 그리고 골동품과 손수 만든 장식품들로 채워 놓으니 무척 아늑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어머니 방이라고 안내해 준 곳에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는 뜨다가 만 뜨게 용품들이 놓여있고 오래된 액세서리, 오래된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방안에 전시되어 있어 무척 고풍스럽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값비싼 명품과 번쩍번쩍 화려한 장식품들로 채워진 집이 아닌 오래 전해오는 의미 있는 소품들 그리고 손 때 묻은 정성이 이 집의 가치를 훨씬 돋보이게 했는데 이곳은 결코 짧은 시간에 쉽게 완성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런 큰 집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들의 부지런함에 말 문이 막힌다.
사람들을 전혀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노부부의 숲 속 생활이 궁금해진다.
그런데 갑자기 예닉은 나무가 많은 숲 속이라 멧돼지들이 가끔씩 나타난다며 조심해야 한다는 말에 평온했던 내 마음이 조금은 불안해진다.
모든 게 완벽할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숲 속에서 자주 보았던 저택의 내부가 항상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조금은 궁금증이 해소가 된다.
시간이 지나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는 정원 한쪽에 마련된 바비큐시설에 장작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석쇠에 고기와 채소, 치즈를 올렸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숲 내음, 연기 냄새,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어우러지자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고기 한 점, 구운 버섯 하나에도 자연 속에서 먹는 특별함이 더해졌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이 소소한 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체코의 대도시 주민들은 주말이 되면 시골이나 숲 속의 작은 별장으로 떠나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걷고, 자연을 즐기며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
도시의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에서 고요와 여유를 만끽하는 이들의 생활은 마치 삶의 균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그들에게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의 생활을 보며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휴일마저 업무와 약속들로 채워지는 우리의 삶.
‘쉼’을 우리의 생활에서 종종 미뤄 둘 일의 목록처럼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체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한 편의 잔잔하고 느린 영화처럼 다가온 시간이었다.
이 숲 속에도 해가 천천히 지고, 노을이 나무 사이로 퍼져가니 동화 속 풍경이다.
핸드폰도 잊고, 시간도 잊은 채, 오직 자연과 함께한 하루.
이보다 더 완벽한 휴식이 있을까?
이 글은 2025년 5월 여행 중 쓴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