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지니
그냥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죽고 싶다기보다는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 설명도 필요 없고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는 회사를 다닐 때 너무 힘들었다.
말주변이 좋은 편도 아니고,
유머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을 상담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마치 말을 짜내는 우물 같은 기분이었다.
퍼 올릴수록 바닥이 드러나는.
그리고 전략도 없는데 정치질이 난무하는 곳에서 나는 생존해야 했다. 눈치를 많이 봤고 그냥 참았다.
누군가 날 억까하고 세상이 날 휘둘러도 그냥 꾹 참았다.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았는데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벙어리 10년. 진짜 말문이 막혔다.
필요한 걸 요구할 수 없게 바보가 되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면 그냥 누웠다.
에너지가 없었다.
주말이면 잠을 몰아 잤다.
엄마는 나를 깨우며 말했다.
너는 허리도 안 아프냐고.
나는 대답했다.
누워 있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앉아 있어야 하냐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우울증이었다.
우울증 인지도 모른 채 기운이 없다. 무기력하다.
요즘 뭘 봐도 웃음이 안 나오고 재미가 없다.
그때 친구들은 늘 말했다.
다 지나간다고.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그 말이
왜 그렇게 위선처럼 들렸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숨 쉬는 것도 벅찬데
미래형 문장으로 나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미래의 넌 괜찮을 거니까 지금도 참고 있는데 더 참아.
숨이 콱 막혔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이런 말을 했다.
회사 때려치울 거야.
한 달만 쉬면 좋겠다.
맨날 누워 있고 싶다.
어디 안 아프나. 아파서 입원하면 쉴 수 있을 텐데.
월급은 왜 이 모양이냐며, 일에 비해 너무 적다며
투덜거림이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진상이었을 것이고
친구들은 듣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둘씩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없다.
더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깊은 우울증이 있었다.
우리 집은 그렇게 화목한 편도 아니었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며
대리 위안을 얻고, 간접 상담을 받으며
어린 시절 내가 왜 그렇게 우울했는지를 이해했다.
난 내가 잘못했고 틀렸단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저 겸손해서인 줄 알았다.
아니다.
어릴 때 교육이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자리 잡아 그런 거다. 돌아보니 누구보다 잘나고, 열심히 살았고, 소중한 존재다.
어릴 적 나는 앞으로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지는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채 당장 이 고통을 끝내는 방법만 계산하고 있었다.
죽으면 다 끝인데,라고 조용히 생각했고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때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도
내가 죽어서 그 사람들을 슬픔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지금 보면 너무 어둡고 유치한 발상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 정도로 우울했었다.
이번에 퇴원을 하고 방정리하다
중학교 때 쓴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날도 힘든 일을 겪고 증오의 상황인 내용인데
일기 중간에
마흔쯤까지 살다가 백혈병이든 뭐든 아파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소원은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나이도 병도 이상하리만큼 현재의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소름이 돋았다.
오래전에 던진 말이 늦게 돌아와 조용히 발에 걸린 느낌이었다.
작년 여름 『급류』라는 소설을 읽었다.
거기엔 이런 문장이 나왔다.
말은 힘을 가진다.
그 문장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쌓이면 그게 사람이 된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불행해도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
넘어져도 바닥에 눕고 또 일어난다.
친구들 말이 맞았다.
다 지나간다.
지금 이 고통이 최고일 거 같지만
살다 보면 사라지기도 하고 더한 고통이 오기도 한다.
그러니 어차피 소원을 빌 거라면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지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걸 빌기로 했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나
잘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잘 살아야겠다.
내가 미워했고 나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배 아프도록.
요즘 나는 매일 빈다.
사라지게 해 달라는 대신 크게 아프지 않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게 해달라고.
나와 가족이 아프지 않게 지내기를.
좋은 사람들과 너무 애쓰지 않고 자주 웃으며 지내기를.
시련이 있다면 적당히만 오기를.
가능하다면 지금 크게 맞았으니 충분하다고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별일 없는 하루가 계속되기를.
크게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게 살기를.
돈 때문에 마음 졸이지 않을 만큼은 잘 벌게 해 달라고도 빈다. 그리고 욕심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로또 1등도 해보자고 슬쩍 덧붙인다. ㅎㅎ
예전처럼 절박하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 마시며 자연스럽게 빈다.
이 정도면 살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으로.
어릴 때 철없이 빌었던 말도 안 되는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다 큰 지금의 내가 비는 소원도 말이 안 되더라도
이루어질지니..
#소원은이루어진다 #이루어질지니 #이왕이면큰소원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