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꽃의 하루
1. 수업을 공개합니다.
가을은 교사들에게 학부모 공개 수업의 계절이다.
운동장 은행잎이 바스락거리는 그 시기,
선생님들의 심장도 함께 바스락거린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내가 학부모이면 시간과 복장이나 좀 신경 쓰겠지만,
안타깝게도 공개를 하는 사람이 나인 날이다.
그래도 10년간 학교에 있었더니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무슨,
아직도 공개 수업일이 잡히면 긴장한다.
어느 학교든 그곳의 가장 저학년 교실이 가장 붐빈다.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신다.
2. 중3의 역습
중학교 3학년을 가르치느라 좀 방심하고 있었는데
참관 신청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다른 반과 달리, 다섯 분이나 오실 예정이었다.
"부모님들은 선생님한테 별로 관심 없어요."
교무실에서 서로 위로하며 주고받는 구호와 같은 말이다.
나도 초등 4학년 첫째의 공개 수업에 가봤지만,
정작 선생님보다는 내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눈길이 갔다.
내 수업의 포인트도, 결국 그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활짝 핀 꽃이다.
같은 햇살을 받아도 빛깔이 다르고, 피는 속도도 다르다.
그중 우리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피어나는지,
그리고 다른 꽃들과 어떻게 어울려 풍경을 이루는지.
나는 그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3. 광대 모드 ON
게다가, 영어 수업은 뭐다? 퍼포먼스다!
나는 오늘 하루, 광대가 된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가 수업 들어가는 5반아.
너네의 미션은 망나니 되기다.
스스로에게 기합을 주며 마음을 다잡았다.
"선생님! 오늘 우리 엄마 와요!" 5반의 햇살, 5반의 해바라기,
재희가 복도에서 인사를 해왔다.
"오, 재희야. 잘할 수 있지?"
"저만 믿으세요! 저희 아빠도 오세요."
"와, 두 분 다? 사이가 좋으시구나."
"이혼하셨어요."
아이의 밝은 얼굴에 당황스러움도 잠시, 재희의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그랬구나... 재희야, 우리 잘해보자." 많은 의미의 '잘해보자'였다.
재희는 한 손으로 노트북을 들고 있는 날 보더니, 슬쩍 뺏어 들었다.
"쌤, 교실까지 같이 가요."
4. 헬로, 에브리원
광대와 망나니 1이 교실에 등장하자, 교실이 들썩했다.
약속대로 "Hello, teacher!" 하더니 자기들끼리 푸하하 웃어댔다.
"Hello, everyone! 여러분, 자리에 앉아 봅시다.
마치 짠 것처럼 인사소리가 크네요."
또 한바탕 긴장된 웃음소리가 터졌다.
살짝 목례를 하며 뒤에 계신 부모님들을 보니 같이 웃고 계셨다.
단 한 분, 아버님은 조금 표정이 굳어 있었다.
퍼포먼스는 순조로웠다. 교과서 본문을 아이들이 직접 만든 동영상을 시작으로,
단어 초성 퀴즈, 모둠 활동으로 쭉 이어졌다.
제스처 보고 단어 맞추기에서 아이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중3이라 추상적이고 어려운 단어도 많았지만 찰떡같이 표현하고, 맞췄다.
5. "범죄자 새0야!"
focus on. 재희가 앞에 나와 두 눈을 부릅떴다.
영어 단어도 떼창이 가능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crime. 민찬이가 교탁 위 내 노트북을 가져가려고 했다.
"No, no!" 수업 중단 위기에 황급히 내가 말리자,
아이들이 "야 이 범죄자 새0야!"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공개 수업날인지 그냥 퀴즈 푸는 날인지, 교실은 과몰입으로 가득 찼다.
그중 가장 몰입한 분이 계셨으니, 재희 아버님은
아이들이 문제를 맞힐 때마다 제일 크게 박수를 쳐주셨다.
6. 괴물 그리고 겨털
어느덧 마무리 활동, Monster 그리기만 남았다.
"Draw a circle and three eyes, and one leg."
한 모둠의 괴물 묘사 말을 듣고, 다른 모둠원들이 그리기.
원본과 가장 비슷하게, 가장 빨리 그린 모둠이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시간 조절용으로 넣은 활동인데 반응이 엄청났다.
묘사하는 말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주희야! 서클, 서클을 그리라고!"
"암 헤어? 야! 겨털! 빨리 그려!"
하... 겨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아이들의 함성에 창밖의 단풍이 가지마다 흔들렸다.
7. 수업이 끝나도 남는 마음
분명 목표한 대로였지만 아이들은 지나치게 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다 같이 몰입하는 수업은 얼마나 즐거운가.
수업을 마무리하며 문득, 아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수업은 즐겁게 잘 따라가는지.
많은 부모님들이 궁금하실 것이다.
솔직히 평소보다 조금 '짜여진' 수업을 보이기는 하지만
한 송이의 꽃을 유심히 보면 줄기나 잎이 자라는 방식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 계절은 그런 성장의 결을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시간이다.
8. 너라는 한 송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프랙탈의 원리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닮는 자연의 법칙이다.
짧은 수업 한 장면 속에서도 아이의 하루와 성장이 고스란히 비친다.
그 작은 프랙탈을 통해 부모님들이
조금은 안심하고, 또 얼마간은 대견한 마음을 품으셨기를.
교실에는 저마다 다른 색과 향을 지닌 꽃 같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물론, 꽃이 아니어도 좋다. 나무이든, 들풀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어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귀하다.
재희가 햇살을 나눌 줄 아는 해바라기 같은 아이임을
오늘, 아버님도 어머님도 보셨겠지.
작은 구성원들이 모여 큰 망나니 꽃밭이 된 교실.
가장 큰 광대꽃은 웃으며 수업을 마쳤다.
가을 햇살이 청명하게 아이들 머리 위로 고루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 너라는 꽃이 얼마나 환히 피어나는지,
나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