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밀밭 메세타에서 지구는 둥글다.
메세타 지역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5시 30분에 길을 나섰다. 메세타 지역은 순례자에게 꽤 악명 높은 지역이다. 길가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키가 큰 나무는 보이지 않고 끝없는 지평선의 구릉지대에는 밀밭뿐이다. 여름철에는 건조한 날씨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 위에 두고 걷는데 그늘이란 손 바박만큼도 없어 온 몸으로 열기를 느껴야 하고 겨울에는 깡 추위와 혹한의 거센 바람을 뚫고 가야 하는 걷기 힘든 길이다. 증간에는 마을도 드물어 마땅히 쉴 곳도 없다.
하지만 순례자에게 혹독한 자연조건은 진정한 순례자로 거듭나게 한다. 예시 당초 편안함만 생각했다면 이 길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이 깊어야 산이 높듯 힘든 만큼 이겨내고 나면 성취감은 배가 된다. 단조롭게 느껴지는 끝없는 밀밭길에 들어서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바다가 아닌 이곳에서도 느끼게 된다. 스페인이 유럽의 곡간이란 말이 실감 난다. 끝 간 데 없는 밀밭은 걸어도 걸어도 밀밭뿐이다.
간밤에 묵은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로 호스피탈레로 마을 아저씨 같았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는 대부분 이런 형태로 운영이 된다. 어젯밤은 쌀쌀한 기온 탓에 조금 춥게 잤는데 사무실 일로 신경을 썼더니 순례길이 엉망이 되고 밤에는 잠도 설쳤다. 그래도 길에 서야 했기에 무거운 몸으로 걷는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땅이 축축하다. 어둠 속에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길 안내 표시가 없어 잠시 헤매다가 길을 찾았다. 어두울 때는 길 표시가 잘 보이지 않아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첫 번째 마을인 칼사디스에 도착하니 주변이 서서히 밝아 오는데 부르고스 입구에서 헤어졌던 대학생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우리가 잔 알베르게가 만원이 되어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도 만원이라 30유로를 내고 호스텔에 잤다고 했다.
다음 알베르게가 멀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순례길에 서면 좀 여유롭게 걸으려고 해도 순례자 수가 많아 숙소 확보가 늘 관건이다. 그런 호스텔 마저 없다면 그다음 마을까지 가던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와서 숙소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일찍 출발하고 빨리 숙소를 잡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전구간이 그런 건 아니다. 알베르게가 적은 작은 마을에 잘 때가 제일 문제가 된다.
메세타는 스페인어로 고원이란 뜻으로 이 고원지대에 올라서면 사방을 둘러봐도 끝없는 둥근 밀밭 밖에 보이지 않고 사람도 거의 만날 수 없다. 요즘 오후만 되면 비가 내려 진흙 길을 반죽을 해 놓으니 뻘밭 같이 질퍽하다. 그 진흙이 얼마나 찰진지 신발이 착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고 미끄럽기 조차 하다. 그러다 보니 신발에 찰흙이 잔뜩 묻어 묵직해진다.
그 길이가 수 km나 되니 걷기도 힘든데 자전거 순례자는 여기서 생고생을 한다. 자전거를 탈 수가 없는 상태의 길이라 끌 바를 해야 한다. 내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드는데 자전거까지 밀고 가야 하니 엎친데 덮친 격이다.
그래 인생도 늘 맑음만 있나. 살다 보면 흐린 날도 비 온 날도 있듯 순례길도 늘 좋은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진흙길도 아스팔트 길도 있지 않는가. 그냥 길을 구분 짓지 말고 그냥 걸어 보자. 그게 순례길이 아니던가.
먼지, 진흙, 태양과 비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리고 천년이 넘는 세월 속에
수 천 명에 수 천명을 곱한 순례자들.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불렀는가?
어떤 신비한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그것은 별들의 땅도,
대성당들도,,
나바라의 산악도 아니며
리오하(Rioja)의 와인도 갈라시아의 해산물도
카스티야의 넓은 들판도 아닐진대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불렀는가?
어떤 감춰진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그것은 까미노에서 만나는 인연들도
시골의 풍습도
역사와 문화도 아니며
까사다의 닭들도, 가우디의 궁도
폰페라다의 성경책도 아닐 것이다.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모든 것과 모든 것을 보는 즐거움
그러나 더 심오한 곳에서부터 나를 부르는 소리
나를 밀어주는 힘
나를 이끄는 힘을 나 자신도 설명할 길이 없다.
오로지 저 위에서 계신 분만이 아실 것이다.
- Eugenio Garibay 수사 -
진흙 길이 끝나는 온타나스에는 10시 50분에 도착하였다. 비를 맞고 걸었더니 춥기도 하고 진흙길을 걷느라 많이 힘들었다. 바에 들려 따뜻한 음식을 먹으러 들어서는데 진흙을 터는 기계가 입구에 있다. 이 구간은 진흙으로 유명한 길이다. 바에서 핫쵸코를 주문했는데 달아도 너무 달다. 그래도 허기에 지쳐 당이 필요해 깨끗이 먹어 두었다. 진흙길이 끝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 동양인으로 대만 아가씨들을 만났다. 피부색이 비슷하니 친근감이 간다.
카스트로 헤리스까지는 양주에서 온 아가씨와 함께 걸었다. 순례길의 길동무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는 만나는 게 일상이다. 산 안톤으로 가는 길에 한국 자전거 순례자를 만났다. 남미나 유럽에서 온 자전거 순례는 많이 만났는데 한국에서 온 자전거 순례자는 처음 만났다. 반갑다고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만에서 온 아가씨 순례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걸어 카스트로 헤리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0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를 배정받았다. 조금만 늦었으며 더 걷던지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야 했다. 바로 알베르게 앞에는 "Full"이란 안내판이 내걸린다.
햇살이 너무 좋아 빨래를 하여 널고 양주에서 온 아가씨와 마을 나들이를 나갔다. 그녀는 내일쯤 순례길에서 만난 언니가 뒤 따라오는데 만나자고 한다면서 내일은 느지막이 천천히 걷겠다고 했다.
카스트로 헤리스 마을은 인구 천여 명이 사는 이곳에서는 꽤 큰 마을인데 주로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이 많이 산다. 특히 한낮에는 시에스타에 빠져 사람 구경하기 힘든다. 마을 뒤에 산꼭대기에는 9세기 지어진 허물어진 성이 있는데 피곤하여 마을 성당만 둘러보고 이 마을의 풍습에 따라 시에스타를 즐기고 저녁은 오랜만에 식당에 가서 순례자 메뉴로 먹물 빠에야를 먹었다. 순례자 세트메뉴에는 늘 와인 1병이 나온다. 가격은 14유로.
빠에야는 불린 쌀을 끓여 만든 음식이라 동양인들이 밥 생각이 날 때 즐겨 먹는다. 새우 빠에야를 먹고도 더워서 맥주를 한잔을 더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더위를 날려 보내 준다. 이곳 5월의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게 추위를 느끼지만 한낮에는 여름철 더위를 느낀다. 그리고 오후 2시 전후로 비가 내리는 것도 일상적이다.
오늘은 메세타 지역의 진흙길이 특히 인상 깊은 하루였다. 알베르게에서 대전에서 오신 부부팀을 만났는데 나이는 회갑을 넘기고 부부가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인천을 출발하여 파리 공항에 내렸는데 마침 작년 가을에 산티아고 길을 걷고 너무 좋아 다시 왔다는 서울서 오신 어머니 두 분과 만나 동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네 분이 혼성팀으로 지금까지 걸었고 앞으로도 함께 걷는다고 했다. 그 후 두어 차례 만났는데 숙소 예약에 특별히 신경을 쓰며 걷고 계셨다. 남편분이 유머가 있는 참 재미있는 분이셨다. 순례길의 만남은 잠시나마 타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 좋다. 카스트로 헤리스는 스페인의 전형적인 농촌으로 전망이 좋은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