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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Jan 31. 2023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천상 배우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한 햄릿의 분노와 배신감을 읊조리던 배우의 낮고 비통한 음성. 오호라, 내 속을 빗대 표현할 수  방법을 찾았다.  고2 끝 무렵, 학교에서 단체로 보았던 "햄릿"을 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전율과 흥분이 며칠간 지속되었고 나는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변변히 연기 학원도 못 다니고 지원한 연극영화과 실기 시험 때, 그때까지 뇌리에 강력하게 박혀 있던 햄릿을 비장하게 연기했다. 웃음을 꾹 누른 엄숙한 말투로 교수가 내게 물었다.

"햄릿을 굳이 연기한 이유가 뭔가요? 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작고 똥똥한 몸매를 훑어보는 교수의 눈웃음이 재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재수를 했다. 이듬해 실기시험장에서 나는 남녀 구분 없이 할 수 있는 어릿광대가 되었다.

"모든 세계는 연극 무대이며 남자든 여자든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이 대사처럼 내 인생을 무대에서 올리는 심정으로 남녀 구분 없이 어떤 연극에서든 모든 역할을 잘 소화해 냈다. 연기력이 좋으면 언젠가 날 알아 줄날 이 오겠지. 그러나 어쩌다 조연, 대부분 단역배우였던 나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식당 주방 보조, 홀 서빙, 편의점 야간 판매원, 그리고 나의 맑고 영롱한 목소리를 이용해 모닝콜 서비스를 했다.


 모닝콜을 해주다 남편을 만났다. 게으르고 어설픈 남자였다. 하긴 부지런한 사람이 모닝콜 서비스를 신청할리 만무하지만, 허우대 멀쩡한 게다가 다달이 월급 받는 회사원, 나는 매일 아침 그의 '귀여운 여인'이 되어 로맨스를 연기했다. 그가 내 목소리에 반해 토요일에 한 번만 만나 달라는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만났는데 그가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 표정에 익숙한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술을 권하며 그의 정신을 쏙 빼놓을 이야기들을 끓임 없이 안주로 쏟아냈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술탄이 부인들을 못생겨서 첫날밤에 다 죽였겠는가. 세헤라자드가 이야기로 술탄의 상처를 보듬고 자기 목숨을 구하는데 천일이 걸렸다면 주변머리 없는 남자를 꾀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혼신을 다했던 탓에 바로 임신을 했고 불러오는 배를 감추려 흰색 한복을 웨딩드레스 대신해서 입고 신부입장을 했다.

 아들을 낳고,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안정적인 월급쟁이의 아내 역할은 노역이고 고역이란 것을 알았다. 아이가 커갈수록 필요한 돈의 액수는 아이의 키만큼 뛰어올랐다. 학습지 교사와 보험 설계사를 병행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워 못 만나겠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렇게 사람들도, 연극 무대와도, 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기죽고 살지 않았다. 내게 월급쟁이 남편도 있고 옹골진 체격은 나를 닮고 키는 아비를 닮아 날이 갈수록 허우대 멀쩡해지는 아들도 있고,  학습지와 보험 일 때문에 인맥 넓히려 사심으로 시작했지만 내 든든한 지킴이 신도 있으니.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신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찾기만 하면 담판을 벌이려 한다. 세상 만만하게 살던 한 놈이 음주 무면허로 차를 몰아 남편이 운전하던 차를 들이받았다. 그 죽으려고 환장한 놈은 혼자 안 뒈지고 내 아들을 저승으로 끌고 갔다. 아들을 지키지 못해 면목이 없는 건지 남편은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있다. 남편이 깨어나지 못한 지 7년이 되어간다. "주여, 왜? 제게 나타날 염치가 없으셔서 숨은 거면……." 나는 기도를 멈추고 신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찬양을 멈추기로 했다.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해 편의점 알바를 하고 주말 고깃집 식판 닦는 알바도 추가했지만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밤이면 나는 술 병을 앞에 놓고 혹시 신이 나를 몰래 지켜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과 협상을 시도한다.  "내가 죽어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까? 죽어서 천당 가면 뭐 합니까? 산자는 버리고 죽은 자들만 챙기고 계십니까?" 여전히 신은 답이 없다. 번번이 신과 협상 결렬. 걸신이 든 건지 먹어도 허기가 지고 마셔도 목마르다.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마시고 머릿속 생각을 비워낸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다시 연극을 한다. 어릿광대처럼 유쾌하고 재미있는 역할을 한다. 어릿광대가 주인공이면 관객은 웃을 준비부터 한다. 관객들은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울음 밖에 안 나올 현실이라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이겠지.  "유쾌하고 즐거운 인생", 나는 나를 잊고 혼신을 다해 연기한다. 덕분에 단골이 많이 늘었다며 편의점 주인이 좋아하고 고기 집 사장은 일이 끝나면 시간 외 수당까지 챙겨주며 나와 함께 노래방에 가고 싶어 한다.  

 물론 밤이면 신과는 여전히 협상과 결렬을 반복하고 술 마시고 신에게 눈을 흘기지만, 내가 칭얼대고 울부짖을 곳이 하나님 앞뿐이라 신을 해고할 생각은 없다.     

 

 오늘도 초점 없이  멍한 눈을 뜬 남편에게 빈정거림 반, 애교 반 섞어 말한다.

"그렇게도 아침에 못 일어나더니 만날 누워 자니 편하냐? "

그가 눈을 감는다. 그래 네가 정신이 있으면 내게 면목이 없긴 할 거야…….  남편의 베개를 들어 먼지를 털다 남편의 얼굴을 본다. 눈 감은 남편의 얼굴. 힘껏 누른다. 그에게는 발버둥 칠 기력도 없다.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동시에 흐른다. 훌쩍, 후울쩍 콧물을 삼켰다. 짜다. 짠맛이 온몸에 퍼지니 맥이 풀렸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베개로 남편의 머리를 받치며 읊조렸다.

"후훗, 호호호, 약한 여자 말고 강한 아줌마 ㅇㅇ님 보호자 분 오셨네요" 커튼을 걷으며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휴지를  두어 장  뽑아 코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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