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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Jul 19. 2023

엄마에게 가는 길

가장을 바꾸다

  원정이 큰 길 모퉁이 돌아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저만치에서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아빠의 목말을 타고 있었다. 아이의 팔목에 풍선이 묶여 있는 모습이 놀이 공원에라도 다녀오는 길인 듯 보였지만 그들의 뒤에서 걷는 원정은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꼬마의 엄마는 슈퍼에라도 갔나, 아니면 ……. 괜한 궁금증에 원정의 걸음이 빨라졌다. 옆에서 보니 젊은 아빠의 손은 목말 탄 아이의 다리를 꼭 잡고 있을 뿐 가방이나 짐꾸러미는 보이지 않았다. 짐은 엄마가 가져갔나보다. 아빠가 혼자 애를 키우는 건 아닌가 보네. 그새 해가 완전히 들어가고 가로등불 빛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생겼다. 원정은 부자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이 어색해 천천히 걸음걸이를 늦췄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아이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자꾸 뒤로 잦히는 게 보였다.  “어머, 애기 뒤로 넘어갈 거 같아요.”  애기 아빠가 멈춰서 얼른 아이의 몸통을 잡아 앞으로 돌리며 아이를 내렸다.      

  

  저 나이 때  쯤이었나, 나도 아빠 목말을 타본 일이  일이 있는데...  그 어깨는 딱딱했고 원정은 멀미가 났었다.  세상 구경 시켜 준다며 어린 원정을 목말 태우고 올라가던 언덕길. 마당에는 선인장과 봉숭아 화분이 즐비한 집, “다 큰 애를 무등 태우고 언덕길을 올라 왔니? 이러다 어깨 나가?” 할머니가 원정을 받아 내리며 혀를 찼다. 아빠가 아니라 삼촌이었나? 원정의 기억에는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의 흔들리는 어깨만 남았다.      

 원정에게 온전히 남은 기억의 시작은 다섯 살 무렵 비가 줄기차게 퍼붓던 날 저녁이었다. 원정은 대청마루 쌀뒤주 옆에서 가만히 서서  열두 살 위 언니가 아버지에게 앙칼지게 대들다 뺨을 맞는걸 보았다. 원희가 아버지에게 종이쪽지를 내던지고 그 길로 방에 들어가 학교에서 돌아 온지 얼마 안 됐는데 다시 교복을 챙겨 입고 책가방을 쌌다. 그리고 원정의 옷도 외출복으로 갈아입혔다. 원희가 원정의 손을 잡아끌고 방을 나왔다. 현관에 있던 우산 하나를 집어 들고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할머니 집을 나섰다. 원정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언니에게 말시키면 안될 꺼 같아 샌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빨리 슬리퍼를 신고 따라나섰다. 어둑해진 돈암동 비탈길이 빗물에 반짝였고 미끄러웠다. 슬리퍼를 신고 언니의 걸음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원희가 멈춰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어린 동생을 업고 다시 가방을 들었다. 우산이 내동댕이쳐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우산을 집어 다가와 언니의 책가방도 집어 건넸다. “우산은 꼬마가 언니 목에 걸쳐서 잡으면 되겠네.” “내가 할 수 있어”

원정은 등뒤에서 우산을 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희도 자신이 우산까지 들 여력이 안된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너 다시 할머니 집에 가자.” “싫어 절대로 안가. 언니 따라 갈 거야.”

 원정은 우산이 아주 버거웠지만 꾹 참았다. 언니 목에 팔을 감고 그 앞에 언니 시야를 가리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며 우산을 들었지만 우산은 자꾸 앞으로 쏟아졌다. 비가 잦아들었다. 원희가 한숨을 쉬며 원정을 내려놓았다. 원정은  양손에 각각 우산과 가방을 든 언니의 축축한 교복 치마를 꼭 쥐었다. 둘은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걸었다. 삼선교를 지나 긴 돌담길이 이어지고 혜화동 로터리에 접어들었다.

"언니 우리 엄마한테 가는 거야? 어치, 에이취, 에칙” 원정이 연신 재치기를 해댔다. 오락가락 다시 비가 내렸다.

   한옥 집들은  처마가 있어서 비올 때 비피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다. 대문 옆 기둥이 비에 젖어 쾌쾌하게 쩌든 나무 냄새를 풍겼다. 원희가 초인종을 눌렀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래도 엄마가 나오지  않자 원희는 길가로 돌아나가 불 켜진 창문을 두들겼다. “엄마, 우리에요….”

원희의 안경으로 정신없이 빗물이 타고 내렸다. “엄마! 원정이가 열이나요. 어서 문 좀 열어줘요”       

아침 일찍 두 자매의 엄마 도영이 문도 안 연 약국 문을 두들겨 약을 지어왔다. 원정에게 숟가락에 가루약을 풀어 먹였다. 원정이 받아먹고 그걸 삼키느라 치를 떨었다. 도영은 원정에게 다 싹싹 먹어야 된다고 물을 두어숟갈 더 먹였다. 그리고 그녀는 드롭스 캔디 통에서 빨간색 사탕을 집어 원정의 입에 넣어주었다. 달콤한 엄마의 냄새가 났다. 밤새 빤 교복을 다림질 하던 원희가 도영을 보며 말했다. “다 늦게 쟤는 왜 낳아서 엄마도 고생, 나도 고생, 제두 고생이람.” 도영은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원정의 외가에선 도영이 서 씨 애들 애비에게 안 넘기고 지지리 궁상으로 살려면  발걸음도 말라고 내쳤고  친가에선 엄마한테 가버린 이상 애들을 돌볼 수 없다고 발뺌하였다. 이렇게 가족의 속에 남자가 배제된 세 모녀의 삶이 시작됐다.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던 해, 선진국의 대열에 낄 날이 머지않았다고 티브이와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흘러 나왔지만 이혼녀와 두 딸, 이렇게 세 여자만의 세상은 이상하리마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동네 세탁소 주인이나 쌀집 아줌마는 ‘그래도 애 아버지가 애들 보러 한번은 안 오겠냐’고 했다. 도영의 고향 친구도 가끔 들러서는 원정에게 잊지도 않고 한마디씩 했다. “너 아빠한테 안가니? 가서 돈 좀 타다 엄마한테 줘봐. 그냥은 양육비도 띄어먹을 판이네“ ”어휴, 애한테 별소리를 다 해.“ 도영은 친구에게 눈을 흘기곤 했다.   

   

도영의 기일이었다. 연신 내리를 비 때문에 납골당에 가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날 좋을 때 가든 내가 한국 나가서 가든 그러자. 내가 타국에서 맏딸 노릇 못해도 네가 있으니 엄마 기일도 챙기고 나도 고국을 안 잊어버리고 좋다.”

 이제 멀리  부자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노란 풍선이 가로등 빛을 받으며 둥실둥실 떠 다녔다. 원정이 도어락 비밀 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혼자사는 그녀가 소리내어 인사를 했다. "다녀 왔습니다." 거실 책장 한 편에 놓은 영정 사진 속 도영이 웃고 있었다. “내가 그 와중에도 엄마 사진 잘 골랐지.”원정이 도어락 안전장치를 걸고 자신의 세상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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