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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Jun 18. 2023

추상명사

남자배제 

     초, 중, 고를 걸어서 10분 거리의 학교를 다니다  전철 4호 선을 타고 다시 서울역에서  1호선을 타고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원정에게는 고역이었다. 칙칙한 형광등 불빛의 1호선 역사들이 풍기는 찌든 삶의 냄새가 그녀는  특히 싫었다. 그래서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탈 때면 안도의 쾌재를 지르곤 했었다. 원정은 전철 안에서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란  노래 가사를 주문처럼 흥얼거렸다.  노래 가사처럼 1호선과 4호선을 탈 때 얼굴이 표정이 달라지는 여자를 알아채는 그런 남자를 만날 상상을 하며 지루한 통학 길을 견디곤 했다. 실체 없는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의 허상은 열차가 남영역을 지나면 머릿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허름한 바깥 풍경을 뒤로하고 철이 속도를 천천히 늦추며 두더지 굴 파듯 들어서는 지하 서울역 침침한 형광등 불빛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할 때면 원정은 ‘요이 땅’ 소리에 맞춰 백 미터 달리기 하듯 1호선의 굴레를 어서 벗어날 준비를 했다.


 6월 중순 기말고사가 모두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된 홀가분한 날이었다. 원정은 남영역을 지나 서울역에 들설 때 일찌감치 열차 문 앞에 서서 내릴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1호선 전철을 튀어나가려 한 발을 내 닫는 순간, 열차 밖에서 빈자리를 훑은 곱슬 파마머리 아줌마가 전철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그 바람에 원정의 몸이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플랫폼에 중심을 잡고 선 그녀의 눈에 지하철에 오르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아빠다’ 원정은 외침을 삼켰다.  굵은 뿔테 안경에, 헐렁한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도 원정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열차 문 앞에서 엉거주춤 섰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나 원정은 다시 올라탈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구부정한 중년 남자도 내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전철 문이 닫혔다.  “열차 출발합니다. 노란 선 밖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승무원이 마이크로 안내방송을 했다. 머쓱해진 원정이 한 발짝 더 크게 뒤로 물러섰을 때 전철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원정은 저녁상을 물리며 말을 흘렸다.

“엄마, 집에 올 때 전철에서 아빠 같은 사람 봤다.”

 못 들은 건지, 그런 체 하는 건지 원정의 엄마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원정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머쓱해져 리모컨을 들고도 텔레비전까지 다가가 전원을 눌렀다. 그러나 켜지기는  커녕 대기상태 전원이 꺼져 버렸다. 모녀사이에 긴장감이 비집고 들어왔다.    

“확실해? 알아보겠던?

원정의 엄마가 빈 그릇을 주섬주섬 챙겨 싱크대로 옮기며 물었다.

“몰라, 그냥 아빠 같았어.”

원정은 엄마의 시선을 피하며  행주를 찾아 식탁을 훔쳤다. 싱크대 수도를 틀고 애벌 설거지를 하며 원정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에효, 딸년이 지 아비도 알아보다니…….”

 그리고 원정을 향해 몸을 휙 돌리며 한마디 더  이었다.  

“아비란 작자는 널 알아보는 것 같디?” 원정은 엄마의 질문에 담긴 이혼한 남편에 대한 분노가 그녀의 절반의 유전자로 향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원정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구체적 모습이란 없다. 5살에 부모의 이혼을 겪은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구체화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원망이나 미움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간혹 이렇게 ‘아버지’라는 말이 원정의 생활 속에 불쑥 나타나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아, 참, 나도 모른다니까?‘ 원정은 엄마를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원정은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사친첩을 꺼냈다. 막연한 잔상에 실체를 부여하던,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케 해 주던 가족사진에서 아버지를 가위로 종이인형 오려내듯 잘라냈다. 뿔 테 안경과 떡 벌어진 어깨만 도드라지는 형체로 남은 아버지의 이미지마저 휴지통에 넣었다. 실체가 사라진 ‘아빠’, ‘아버지’는 원정의 사전에 그렇게 추상 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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