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는 어린이 집에 가지 않겠다며 우는 승아가 안쓰러웠지만 독하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너 이러려면 아빠한테 가!”
아빠한테 가,라는 소리와 함께 승아는 울음을 뚝 그쳤다. 그러나 승아는 곧 딸꾹질을 시작했다. 해서는 안될 소리를 내뱉었다는 죄책감에 세희는 승아를 안고 여린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승아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세희는 주섬주섬 책과 프린트 물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가방이 불룩해졌다. 이혼하며 남편과 관계된 모든 걸 치웠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가방. 뚜벅이 시간강사 생활이 그녀의 밥줄이 되면서 책과 생필품까지 모두 넣어도 그리 초라해 보이지 않는 이 가방을 아꼈다.
승아는 아빠 없는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가 집을 자주 비운 탓인지, 눈치가 빤한 탓인지 아빠를 찾지 않는 승아가 세희는 고맙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점 승아는 세희와 떨어지는 시간들을 못 견뎌했다. 같이 있는다고 잘 놀아주는 것도 아니고 응석을 받아주지도 않건만 부쩍 어린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때를 썼다.
오후 네 시가 넘으면서 승아는 밖에서 들리는 구둣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희의 발소리는 커다란 가방을 이 손 저 손 바꿔 드느라 걸음의 리듬이 불규칙하게 이어진다. 승아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차렸다
어린이 집을 나와 모녀는 만두 전문점으로 향했다.
“오늘 엄마가 피곤하니까 만두랑 주스로 저녁 때워도 될까?”
지친 세희의 간곡한 물음에 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가 가방을 열고 지갑을 꺼냈다. 승아는 엄마의 가방 안을 들여다보다 가방 끈을 손으로 잡고 힘을 주었다.
“왜?”세희가 물었다.
“무거워 보여서.”
“괜찮아. 네가 들어준다고 가방 잡으면 더 무거워져.” 세희가 웃으며 말했다.
거실 탁자 한편엔 세희의 빈 가방이 놓여 있다. 순간 승아는 무언가 떠오른 듯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장롱 문을 열고 뒤지기 시작한다. 농 구석에 작은 핸드백이 둘, 그 옆에 종이 쇼핑백이 세워져 있었다. 승아가 커다란 쇼핑백을 안을 들여다보니 세희의 가방이 들어있었다. 승아는 얼른 거실로 나와 세희가 채점하던 시험지를 하나 집어 들며 세희의 눈치를 본다. 그때 부엌에 있던 세희와 눈이 마주쳤다.
“승아! 그거 가지고 놀면 안 돼! 종이 필요하면 프린터에…”
“아냐, 그냥 좀 봤을 뿐이야.”승아가 얼른 시험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가 보면 알아?”세희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승아는 멀뚱히 거실 탁자 위 물건들을 보며 말했다.
“언니 오빠들이 잘하나 보려고….” 승아의 대답에 “후하하” 세희가 소리 내어 웃는 사이 승아는 얼른 손을 쫙 펴서 종이의 크기를 가늠했다.
“승아! 밥 먹자.” 그러나 승아는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열린 장롱 문으로 쇼핑백에서 가방을 꺼내 크기를 손으로 쟀다
“뭐 해? 얼른 안 오고.”
승아는 황급히 쇼핑백과 가방을 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저녁 내내 승아는 안절부절하였다. TV를 보다가 갑자기 방에 들어갔다 나오고 곰 인형을 잠시 업어주는 듯하다가 레고 상자를 꺼내 놓았다. 하지만 세희는 채점에 정신이 팔려 승아가 놀아달라고 보채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나자 승아는 탁자 옆 세희의 가방을 들고 얼른 베란다로 가 세탁기 뒤에 공간에 가방을 숨겼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쇼핑백 속에 들어있는 가방을 끌고 베란다로 돌아왔다. 이미 가방 하나가 들어간 자리에 빈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승아는 가방이 가볍고 부드러워 잘 접힌다는 걸 깨닫고 돌돌 말아 세탁기 옆 세제통이 늘어선 공간에 밀어 넣었다.
“승아! 이제 자야지.”
“엄마는?” 승아는 엄마가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릴까 조마하였다.
“엄마는 내일 수업 준비하고 자야 돼. 먼저 자” 세희가 어깨를 토닥이며 방으로 이끌자 승아는 안도했다. 가방을 지키려 자는 척만 하려고 했건만 승아는 잠이 들고 말았다.
오전 수업이 있는 날이라 세희는 일찍부터 분주했다. 승아를 세수시킨 후 아침상을 차려주고 화장을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세희가 종종걸음으로 집안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승아야, 엄마 가방 못 봤어?”
“응, 못 봤어!” 승아가 단호하게 그러나 세희의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어제 분명히 여기다 뒀는데……”세희는 베란다로 나갔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시계를 본다. 벌써 8시 반이 넘었다. 8시 50분에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야 어린이 집 차에 승아를 태울 수 있고 9시에는 전철역에 도착해야 수업에 늦지 않는다.
“엄마! 아직 가방 못 찾았어? 그럼 저 시험지 못 가져가면 학교 갈 수가 없지?”
승아의 말에 세희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가슴 아렸다. 세희는 중얼거렸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 승아는 잘 들리지 않는 세희의 중얼거림을 듣고 안도했다. 분명히 ‘학교에 갈 수 없네’란 중얼거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희가 방에서 승아의 노란색 파카를 들고 나오자 승아는 절망했다.
“늦었어, 빨리 옷 입자!”라고 말하는 세희 팔에는 파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핸드백과 xx출판이라 적힌 천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 가죽 가방 없이 학교가도 돼?” 아무 대답 없이 세희는 핸드백에 지갑과 화장품케이스를 넣고 천 가방에 책과 시험지를 넣었다.
승아는 지금부터 떼를 써볼까 생각을 시작하는데 세희가 선수를 쳤다.
“오늘도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돼”
어린이집 차에 올라타면서 승아는 엄마 어깨에 걸린 백과 손에 들린 두툼한 책가방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젖은 눈을 손으로 비비며 소리쳤다.
“엄마, 일찍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