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귀인
인생의 중요한 일은 후반부에 일어난다
우경은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홀로 옥탑 방에 산 다는 걸 창피스러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옥탑방에 산다고 하면 몇몇 지인들이 혀를 차는 모습을 보였다. 우경은 그럴 때면 야경이 웬만한 서울 시내 루프탑 카페보다 낫다거나 일종의 펜트하우스라며 나사 빠진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저들의 애잔한 눈빛에 응대하곤 했다.
기실 우경이 사는 언덕배기 4층 다가구 주택의 무허가 5층 옥탑에 올라오면, 멀찍이 한강 대교와 남산, 그리고 한강변에 늘어선 고급빌라들과 아파트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그렇게 내려다 뵈는 전경은 근래 들어 옴짝달싹 않고 방에 처박혀 인터넷만 여기 저기 뒤지는 우경의 숨통과 시야를 잠시나마 트이게 해 주었다. 게다가 옥탑 방 입구 계단엔 구청의 불법건축물 단속을 피하려는 집주인의 꼼수와 외부 칩입을 차단하려 세입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달아놓은 창살형 철문이 이중으로 굳게 잠겨 있다. 그래서 가난한 동네를 배회하는 강도든 좀도둑들이든 힘겹게 올라와봐야 허탈함만 느낄 곳이라, 여자 혼자 거주하기에는 적격이다.
다만 집이고 언덕이고 모두 가파르다 보니 우편 마비가 있는 우경은 집에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 번 그녀는 책가방을 매고 펜트하우스에 살 법한 번듯한 차림새를 하고 장시간 외출을 하곤 했다. 그러나 지난여름부터 첫눈이 내리도록 그녀가 옥탑 방을 오르내리는 기척이 없었다. 집주인은 철문 계단 앞에 놓여있던 우편물과 택배 온 물건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우경의 실존을 확인했다. 그런데 지난 오 년간 밀리지 않고 다달이 은행으로 입금되던 월세가 지난달에 이어 입금 일이 이틀이 지났는데도 아무 기별이 없자 집주인은 덜컥 겁이 났다. 혼자 쓰러져있는 건 아닌지, 몇몇 세입자들이 그랬듯 연락도 없이 몸만 사라진 건 아닌지, 혹여 신문에서 종종 언급되는 고독사나 자살은 아닌지 근심 어린 얼굴로 옥탑 방으로 향했다.
주인은 농사짓는 형님 댁에서 막 도착한 쌀부대 하나를 들고 옥탑 방 현관문을 두드렸다. 서너 번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기척이 없었다. 주인은 쌀부대를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옥탑 방 열쇠를 찾느라 짜랑 짜랑 소리를 내었다.
“아, 잠시 만요. 곧 나갈게요.”
그제서 집주인은 안도 숨을 내쉬며 열쇠를 도로 품에 넣었다. 타당 탕. "아우 씨, 아... 아파." 현관문과 박치기라도 한 건지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 부스스한 긴 머리에 설핏 알코올 냄새가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인이 그녀가 외출할 때 봐 왔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나타났다. 우경의 손에는 두툼한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우경이 주인이 현관 앞에 놓은 쌀부대를 내려다보며 “아........”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주인은 빠르게 쌀부대를 현관 안으로 넣어 주었다.
“안 그래도 오늘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죄송하지만 한 달 치만 우선 드릴게요. 저, 그리고 나머지는 다음 달에 돈 들어오면....... ”
우경이 뱉는 말이 봉투와 함께 시든 배추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러세요. 형편이 그러면 할 수 없지. 요즘은 강의는 그만둔 건가요?”
“아, 예, 그게, 다른 일을 좀 하느라.......”
집주인이 희끗한 머리를 넘기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나중에 형편 되면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주인이 옥탑을 내려갔다. 철문을 닫고 계단에서 서서 봉투를 열어보던 주인이 ‘허어......’ 한숨을 내쉬었다. 봉투에는 오만 원 권, 만 원 권, 오천 원 권, 천 원 권까지 한국은행 발행 지폐가 골고루 들어있었다. 집주인은 잠시 서서 고민을 하다 다시 옥탑으로 향했다.
“생활비로 먼저 써야 할 듯싶으니, 이달치도 나중에 줘도 됩니다.”
우경이 창피함 때문인지 화끈 달아 오른 얼굴로 봉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집주인이 봉투를 그녀의 손에 쥐어줬다. 그렇게 집주인은 그날 그녀에게 나타날 거라던 ‘이달의 운세’에서 지목한 ‘뜻밖의‘귀인’이 되었다.
집주인이 철문을 닫고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입장이 바뀐 반전을 상상하다 우경은 뇌가 뒤죽박죽 될 만큼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들이 그랬다. 중요한 일은 후반부에 일어났다. 우경은 오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