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복수

by mul

그렇게 잠 못 이루고

그렇게 시들어가며

그렇게 쩍 갈라진 채로 굳어 살았건만


그 작고 덜덜 대는 흰 모습에

눈도 못 마주치고 도망치듯 뒤돌아서는 모습에

아랫입술을 꽉 짓이길 뿐이지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눈물이 차고

나는 다시 덜덜 대며 이를 악물게 되고

입이 닫히는데

쏘아붙이고 싶은 말들은 차고 넘치는데

입이 붙고

눈밑이 덜덜거리고

한숨이 훅 나오고


무어라도 소용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동안 짓이겨진 세월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쏘아본다

녀석은 '그럴 줄 알았어'라고 툭 내뱉는다


나도 작아지고 덜덜 대고 희어지고 있잖아


녀석은 되묻는다.

'그게 니 이유야? 말이 안 되는데, 착한 척이야?'

한참을 나를 노려본다.


그럴 수도

이제는 흘려보내줘야 나도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

차갑게 박제된 것들이 어디 가겠냐마는

그것만 내 평생 뚫어져라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저들에겐 없고

나에게만 있는 것을

저들에게 따져 물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 참 논리적이네. 너 좋을 대로 하든지.'

녀석은 휙 돌아선다.


놓아줘야지 이젠.

거뭇거뭇한 과거의 박제 위에

미래의 기억을 계속 덧입히면 될 줄 알았어

하지만 검은색 위에 파란색을 아무리 칠해도

내가 원하는 새파란 색은 안 나와.

그저 멍든 것처럼 검푸를 뿐이지.

그러다

결국 다시 검어져

그러면 나는 아예 더 검게 칠 해

차라리 새까맣게.


그러니 이제는 새 종이 위에 시작하자

하얗고 깨끗한 새 종이 위에

투명한 그대로를 켜켜이 쌓아가는 것

나 그런 삶도 한 번만 살아보고 싶어


녀석은 비웃듯 다시 내게 속삭인다.

'그래. 너 마음대로 하든지'

다시 돌아와 내 옆에 찰싹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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