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셰어하우스 문화
우리는 때때로 관계에 '애증'이라는 말을 붙인다. 가장 대표적으로 가족 관계가 있다. 붙어있으면 싸우고 떨어지면 애틋해진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누구와도 매일 붙어 지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겐 룸메이트가 그랬다.
독일에 처음 갔을 때, 플랫(Flat)이라 불리는 셰어하우스에 살았다. 독일에 가기 전 한국에서 구한 작은 단독주택이었다. 집을 구하면서도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내가 구한 집은 함께 사는 룸메이트가 한 명뿐인데, 30대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럽에 혼성 셰어하우스가 많다고 해도, 단 둘이 사는 건 여전히 걱정이었다. 그래도 어렵게 구한 집인 만큼 일단 한 번 보고서 결정하기로 했다.
룸메이트 분은 내가 다닐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계신 인도인이셨다.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국적을 듣고 괜찮을까 했다. 문화나 종교적 문제가 제일 걸렸다. 그러나 화상 통화를 하며 느낀 그의 첫인상과 나중에 알게 된 그의 모습들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작년에 결혼을 했다고 했다. 같은 고향 출신인 아내 또한 독일의 타 지역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평일에는 일을 가고,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본인은 플랫메이트와의 대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메신저로 대화를 했을 때 활발하고 상냥해 보였던 나를 골랐다고 했다.
한국에서 집을 구하는 내 사정도 이해해 줬다. 해외에서 집을 구할 때 외국인 교환학생들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기에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은 내가 믿음을 가지고 안심할 수 있도록 계약과 관련된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화면 너머로 본 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라면 내 독일 생활의 첫걸음이 환한 무지갯빛으로 물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더욱이 이 집을 놓친다면 다시 60개가 넘는 메시지를 돌려야 했다. 여기보다 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전에 살았던 사람도 여자였다는 말을 듣고 나니, 우려했던 점도 큰 문제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 집과 계약했다. 주변 친구들이 구한 집보다는 조금 더 비쌌지만 그만큼 위치가 좋았고, 보증금도 없는 집이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처음 독일에 입국했을 때, 룸메이트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늦은 저녁 홀로 독일에 도착해 지하철도, 기차도 타 본 적 없는 나를 위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도합 50kg가 넘는 캐리어들을 끌고, 치안이 안 좋다는 프랑크프루트 기차역에서 휴대폰도 못쓰는 채로 밤길을 헤맸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룸메이트가 데리러 와준 덕에 나는 곧바로 안전하게 우리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직접 만나본 룸메이트는 예상대로 친절한 분이셨다. 그리고 깔끔한 성격이신 것 같았다. 독일에 도착한 다음 날에는 아직 친구가 없는 나를 데리고 시내 투어를 시켜주기도 했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서 함께 전망대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는 종종 나를 위해 간식을 사다 주거나, 밥을 나눠주기도 했다. 독일에 온 처음 일주일 동안은 룸메이트와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며칠간 함께 살며 느낀 점은 요리를 잘하고 즐긴다는 것, 그리고 예상과 달리 종교가 없었으며, 가치관이나 결혼관에 있어서도 아주 열려계신 분이었다.
한 가지 더, 그는 말이 아주 많았다. 웰컴 드링크를 마시던 날 저녁에는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탓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가끔씩 인도식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대화가 삐그덕 대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뺀 나머지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룸메이트였다.
문제는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그는 여전히 친절했지만, 때로는 조금 유난스러웠다. 꽤나 깔끔하게 지낸다고 생각했던 나도 그 앞에선 얄짤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난 뒤 싱크대에 물기가 남아있으면 늘 메시지가 날아왔다. 새벽에 늦게 귀가하거나 화장실에 가기라도 하면 문을 여닫는 소리를 조심해 달라며 컴플레인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조건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갈 곳 없는 나를 받아준 고마운 룸메이트였다. 더욱이 이 집에 산 지 햇수로 3년이 넘은 고인 물, 말 그대로 '실세'였다. 내게는 마치 집주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더욱이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평소에 조언도 많이 해주어서 그런지, 가끔은 작은 아빠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의 기준에 맞추고자 했다.
그러나 컴플레인이 10번 이상 넘어갔을 때는, 마냥 좋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날도 문 소리와 관련해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 그때는 조금 억울했다. 같은 사유로 컴플레인을 받은 지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닫을 때는 예민한 그를 배려하기 위해 문고리를 기울여 조심스레 닫았다. 새벽에 귀가를 하면 발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걸었다. 그러나 오래된 집에서 나는 소리들까지 내가 조절할 수는 없었다. 불행히도, 그의 방은 화장실과 벽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항의의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이건 내가 내고 싶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 나는 자연스러운 소리이다. 사람이 살 때 발생하는 최소한의 소리까지 내가 컨트롤하기는 어렵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러자 룸메이트는 그다음 날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좋게 마무리를 했지만, 그 이후로도 사는 동안 몇 번 더 문자를 받았다.
어떤 룸메이트와 살든 간에, 불편한 점은 늘 있기 마련이다. 내 친구는 공용 공간을 더럽게 쓰는 룸메이트 때문에 고민이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청결한 룸메이트 탓에 고민이었다. 마냥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같은 집에서 매일 마주쳐야 했고, 집주인 할아버지의 집에 초대받은 날에는 내내 붙어있어야 했다.
룸메이트라는 게 그렇다. 때로는 밉고 싫지만, 한 지붕 아래 살며 가족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어김없이 날아온 컴플레인 문자에 씩씩거리면서도 다음 날 아침에는 주방에서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다. 유난히 힘들었던 어느 날, 내 기분을 알아챈 룸메이트가 힘내라는 말을 건넸을 때는 일말의 미운 감정을 느꼈던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했다.
한국을 떠나 가족의 품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렇게 독일에서도 애증의 관계를 경험하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과는 조금 다른 결의 감정이었다.
가족보다 멀고 친구보다는 가까운, 그런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