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도둑이 소도둑 될라
너무 친절한 부동산은 멀어졌다.
완전한 차단은 불가피하다. 장사를 하는 이상 또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도 모를뿐더러 좋은 소문은 더디지만 나쁜 소문은 빠른 날개를 다는 업계가 바로 부동산업계다.
꼭 배워야만 아는 것도 있지만, 어찌 흐르다 알게 되는 것도 있다.
권리금장사가 그랬다.
철여는 장사 10년에 수완도 인맥도 늘었다.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착한 사람 보다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 더 좋았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고 오빠들에게서 배운 능력이다. 헝그리정신이 낳은 판매실력까지 붙었다. 판매의 여왕이 되었다.
흐름도 살아났다. 돈의 흐름도 판매의 흐름도 보였다.
옷장사를 하다가 권리금 장사를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돈의 흐름을 읽었다.
한창 금융위기를 맞을 때 일이다. 조기 은퇴하는 명예퇴직자들 중 은행직원들도 있었다.
그때 권 과장이 찾아왔다.
"사장님! 이 매장 저한테 넘겨주시면 안 될까요? 권리금은 잘 쳐 드릴게요."
권 과장은 주거래 S은행 직원이다.
매일 판매대금을 예치하고 월 ㆍ목 송금을 도와준 담당자였다.
위탁판매는 주 2회 본사로 판매대금을 송금하고 목돈으로 한 달 수수료를 받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한 달 매장 매출은 누구보다 잘 안다. 7년 동안 같은 은행을 거래했다.
수선실에서 수선하는 동안은 철여만의 시간이다.
재봉틀 바늘에 실을 꿰다 한 달 전부터 매장을 팔아라는 명퇴자 권 과장의 간곡한 소리를 매듭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시작했던 17평 매장은 32평으로 이전확장해 어느 정도 매출이 안정된 매장을 권 과장에게 팔았다.
본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지만 본사는 그동안 철여의 판매업적을 인정해 주었고, 또 더 넓은 매장으로 오픈하는 조건이 붙었다.
그게 권리금장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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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매장 간판을 달고도 생명부지로 쩔쩔매는 매장을 인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실력이 없어도 돈이 돈 버는 세상에서 돈 없으면 눈치라도 11단, 그래야 살아남는다.
이 눈치는 같은 업종에 같은 연결고리가 있을 때 에라야 더 잘 보이는 거다.
그중 한 매장을 권리금 없이 인수했다. 매출을 올리고 다시 권리금을 받고 되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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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여성캐주얼 D브랜드의 론칭소문을 들었다.
브랜드 희소가치를 노렸던 D 브랜드는 매장을 많이 내주지 않았으니 따내기도 쉽지 않았다. 매출 올릴 파이프 라인으로 기존 남성복과의 매치를 연결시켜 고객 확보가 쉽다는 걸 부각해 따냈다. 석 달만에 또 되팔았다.
대기자가 있었으니 권리금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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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여의 장사 10년째.
결국 17평에서 120평으로 이전 확장해 오픈했다. 하나의 브랜드와 한 매장에서 세 개의 매장으로 넓히고, 브랜드도 늘렸다. P브랜드의 수수료와 D브랜드의 슬라이딩 마진 Z브랜드는 통마진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처음 시작한 P브랜드는 그렇게 황금자리에 입점했고, 남성 단품에서 남녀복합 매장으로 본사로부터 최대한의 혜택을 누린다.
특판행사도 그 중하나였다. 이월상품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단독 행사를 치른다.
= 신사바지, 티셔츠, 남방, 무조건 만원
= 정장 한 벌 무조건 5만 원
= 구두 무조건 5천 원
<만원의 행복>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문자 발송을 하면 무조건 일매출 3천 이상을 찍는다.
경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매출은 높아진다.
반면에 매출의 감소는 근접한 매장이 당한다.
같은 지역구에서도 공정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매장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본사는 '억울하면 떠나'란 무언의 갑질이 시작된다. 물량 배분이 줄고 본사 직원의 눈초리도 싸늘해진다. 이런 을의 서러움은 위탁판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철여는 이런 매장을 권리금 없이 인수해 다시 살리고 되파는 권리금 장사를 했다. 당연히 서로 윈윈 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나쁜 짓은 아니라 여겼다.
경제위기가 오고 명예퇴직자가 늘어났다.
인맥을 동원해 명예퇴직자나 은퇴한 사람들 중 나름의 방식으로 권리금을 붙이고 다시 팔면 옷 파는 것보다 훨씬 수지맞는 장사였다. 권리금은 본사에서도 건물주도 인정하지 않는 일이지만 암암리에 당연한 듯 이뤄진다. 본사는 매장 수를 잃지 않고 건물주는 공실 없는 임대수입을 얻는 거다. 철여의 변명은 날이 갈수록 비양심... 잔머리 굴리기도 능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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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투자 없이 돈 벌 궁리를 한다.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면 머리로 바닥 권리금부터 계산하고 브랜드장사를 기획했다. 브랜드를 따오는 일은 옷장사 10년에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로드샵은 브랜드마다 계약조건과 담보물이 거의 유사하다. 희소가치를 내세우는 브랜드일수록 먼저 선점하는 자에게 우선권이 있지만 장사경력은 더 우선적이다. 철여는 웬만한 패션잡지 연간 구독료를 한 번도 거른 일이 없다. 따내고자 하는 브랜드 히스토리를 미리 익히고 의도에 맞는 옷을 걸치고 그동안 쌓은 패션 감각과 언변으로 면접에 임한다. 수수료도 면접 때부터 반이상 결정되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울인다. 계약 조건을 제시하는데도 초보때처럼 위축되거나 경직됨이 없었다. 갑과 을이 서로 밀고 당기는 밀당도 제법 늘었다.
'강 대 강'이 통했다.
남성복 판매로 시작한 철여의 존재를 거의 모를 때부터였다.
우연한 기회에 판매 특강 강사로 초대를 받으면서 존재감이 드러났다.
전국 350개 매장 점주들이 한해 두 번씩 본사 행사에 참석하는 곳에서 탑 매출 사례를 강의해 달라는 거였다.
피팅룸의 한 줄 글로 고객의 까다로움을 줄여나간 사례다.
(직원을 이유 없이 힘들게 하는 남성들이여)
호랑이는 아무 데서나 성깔을 부리지 않는다
(정찰제가 된 지 언젠데 계속 깎아달라 끼워달라는 여성들이여)
(이것저것 마구 입어보고 다음에 오겠다는 아줌마들이여)
동화를 믿는 여자에게 절망은 없다
글은 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노라고 강의를 마쳤다.
점주들의 박수는 다른 브랜드 영업 사원들의 귀까지 전해져 특강초대로 바빠졌다.
다시 시스템 재정비를 서둘렀다.
자리를 비울수록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매장운영도 빈틈이 생기고 본질을 무시하면 기초부터 흔들린다.
10년 전 샛별이도 돌아왔고, 철없던 현주도 철새처럼 다시 돌아왔다.
둘을 따로 떼놓기만 하면 타고 난 소질을 제대로 발휘한다고 생각해 매장 하나씩을 맡겼다. 별이에겐 여성복을, 현주에겐 남성복을 쥐어줬다. 점장으로, 매니저로, 책임감과 자부심이 충만해졌다. 매출에 따른 인센티브까지 받게 되니 그녀들의 열심은 충성심으로 이어졌다.
돈이 돈을 벌기 시작하고 철새들도 다시 찾아왔다.
새들의 욕망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큰소리 못 친다.
적어도 장사는 그랬다.
지금 덕 보는 것 같아도 언젠가 그 덕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
땀 흘리지 않고 손만 대면 돈이 되는, 노력 없이 되는 건 다 공짜다.
어느 순간 입김하나에도 다 날아가 버리는 게 공짜다.
권리금장사도 길면 그렇다.
이런 훈계는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종합 병원이 걸어 다니는 격이었다. 가는 곳마다 신경성이라 했다.
더 이상 권리금 장사는 끊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기 전에 옷장사의 본질에 집중했다.
인생에 있어 승승장구는 없다.
그저 한 때일 뿐이다.
자칫 자기의 사기를 세우려다 남의 사기를 꺾는 사기꾼이 되기 십상이다.
돈줄기는 물줄기다.
돈의 흐름도 물의 흐름과 같아서 막으면 썩고,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잡아봤자 겨우 한 움큼이다. (바닥을 쳐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안 비밀...)
그냥 흘려보내야 계속 마실 수 있다.
덧:)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을 옷장사이야기다.
게다가 철들게 했다는 이유로 힘든 시간들을 나열하는 글이다.
하지만, 별 쓸모없는 글 같은데도 이렇게 계속 쓰고 있다는 게 대단한 일 아닌가.
이런 뜬금없음은 또 나를 철들게 한다.
약속한 이상 그대로 가 본다.
설움도 컸고 기대감도 컸고 실망도 컸던 부동산에 한 지면을 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