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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철여 03화

너무 친절한 부동산

급히 먹다 체했다

by 나철여
부동산 사장은 친절했다.

건물만 생기면 뛰어 온다. 급매물로 좋은 땅이 나왔다면서 금방 사라질 것처럼 호들갑이었다. 친절도 하지, 좋은 땅을 자기가 안 하고 남에게 소개한다.


매장할 만한 곳은 비어져 있지 않고, 비어 있어도 바닥 권리금이 억 소리가 났다. 그때 남성복 대리점을 시작했다.

본사가 원하는 곳은 이미 다른 업종이 선점하고 있는 곳으로 부동산부터 찾아다녀야 했다. 아주 가끔 급한 사정으로 좋은 자리가 급매로 나올 경우를 대비해 부근 부동산 여기저기 연락처를 남겼다.

부동산마다 중개수수료 수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세등등한 부동산 업자들은 이중, 삼중으로 걸쳐져 있다. 브랜드마다 영업 사원들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고, 잘하고 있는 매장도 권리금으로 부추겨 간판을 바꾸게 하는 교묘한 전략으로 순진한 장사들을 움직이게 한다.


88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그 후 90년 초반까지 간판만 달면 호황을 누리던 호시절에 시작한 옷장사,

그것도 위탁판매로 재고 걱정 없고 물건 떼 올 수고도 없는 남성복 중저가 브랜드 매장이다.

철여는 장사가 처음이지만 대표이사와 가까운 지인의 소개로 까다로운 본사의 조건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92년도 가을, 옷을 입기도 좋은 계절이었고 옷을 팔기도 좋은 시절이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반은 성공한 셈이다.


브랜드가 뭔데?

매장으로 들어오는 객마다 브랜드가 뭔지부터 묻는다.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입 것이었다.

중저가 브랜드는 판매원도 중저가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중저가 옷을 팔지만 명품 판매원이 되기를 기도 했다.

이 기도는 돈 달라는 기도보다 훨씬 크고 고급진 기도다.


철여가 시작한 P 브랜드는 '가격에 거품을 뺐습니다'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

철여에겐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그 이듬해 93년도부터 슬로건에 걸맞은 국민배우 박ㅇㅇ을 모델로 세웠다. 보통사람은 상상도 못 할 모델비였다. 뜨는 배우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 내고 그만큼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틀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매출도 날개를 달았다. 보잘것없이 작은 가게에서 장사 초보가 하는 로드샵이지만 철여의 자부심까지 덩달아 높아졌다.


입소문은 매출이다.

직원은 성과가 인격이고, 대리점 점주는 매출이 인격이다.

좀 된다는 소문이 붙은 상권은 권리금으로 금칠을 해 놓고 있었다. 그런 상권에 근접도 못 했던 철여에게는 한 맺힌 도전이었다. 부동산 사장은 그 사실을 안 그때부터 정보 수집가를 자청했다.

중저가 브랜드는 대중성을 타는 만큼 입소문과 고객의 발걸음도 빠르다. 브랜드마다 중저가 브랜드를 따로 론칭할 정도였다. 그래도 서브브랜드는 서자취급을 받는 서러움도 감수해야 한다. 옆옆이, 또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도 K브랜드 S브랜드 등 중저가 매장들이 줄줄이 오픈했다. 부동산 사장은 또 신났다. 경쟁이 뜨거울수록 디딤돌과 지렛대 역할이 쉬워진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노련한 업자다. 철여의 매장보다 더 크게 자릴 잡고 브랜드의 명성을 한 자락 깔고 들어 온 S 중저가 서브브랜드 매장이 가장 힘든 경쟁자다.


모든 게 처음이지만


경쟁을 신경 쓰다 보면 판매는 순수성을 잃고 겉모습만 치장한다.

철여는 따라 하지 않고 차별을 두기로 했다.

남자 바지는 밑단 수선을 꼭 해야 판매의 완성이다. 매장은 여러 개 들어섰는데 수선하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이 수선도 기술이라고 수선사의 곤조가 상당했다. 규칙보다는 제 마음대로 정하는 순서로 직원들이 바지를 맡기면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배짱을 내민다.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철여는 남편을 설득해 수선 심부름을 맡겼다. 남편에게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도 성취한다'는 성스러운 문구 하나를 얹었다.


수선 기록장은 곧 그 매장 판매실적을 엿볼 수 있었다. 수선비가 많을수록 장사도 잘 된다는 증거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철여는 수선 기록장을 수선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매달아 두었다. 경쟁 브랜드 영업사원들은 새로운 상권 분석을 하고 옆 매장 사장도 비교를 가늠한다. 부동산 김사장도 수선실을 살피고 기회를 엿본다. 다른 골목에 수선실 하나를 더 소개하고 소개비를 챙길 뿐 아니라 S브랜드 점주에게도 철여의 매출 실적을 흘렸다. 그 소문은 같은 업종 다른 브랜드뿐 아니라 캐주얼과 여성복 등 의류 브랜드 본사 영업부들까지 뻗었다.


너무도 친절한 부동산사장은 더더욱 신바람이 났다.

브랜드마다 영업 직원들은 부동산 사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불편한 건 참는 게 상책 아니다.


너무 힘들고 불편하다. 장사도 살림도 다 잘할 자신이 생겼는데 바지 밑단수선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쌓였다. 수선실과의 눈치 싸움도 불편했다. 궁여지책으로 매장 자체 수선실을 만들었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아끼고 수선비도 아끼고 직접 수선을 하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어깨너머 봐 왔던 엄마의 재봉질도, 1년 넘게 눈여겨본 수선실의 수선도, 철여의 결심에 불을 붙였다. 창고 한켠에 미싱과 재봉실 다리미까지 모두 갖췄다. 미싱을 사면 따라오는 장비들이라 장만하기 어렵지 않다. 안에서 바로 수선을 해주면 고객이 다시 찾으러오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철여의 수고는 더 늘어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선을 기다리는 동안 충동 구매가 이뤄지니 매출도 폴짝 뛴다. 빠른 수선은 드문 서비스였다. 제품 따라 원단 따라 수선도 달라야 한다. 판매 후 원단에 따른 관리와 세탁 방법까지 전하다 보면 고객의 특징을 오래 기억하게 되고 연스레 정고객으로 어진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착각은 본질을 잊을때부터다. 옷장사의 본질을 잃게 한 건 높은 매출이기도 했다. 돈냄새를 잘 맡는 부동산 김사장은 철여에게 땅을 사게 했다. 팔랑귀였지만 한눈팔 리 없다.


"은사장! 진짜 아까운 물건인데 일단 가 봅시다."


부동산 김사장은 철여의 남편에게 다가갔다. 남편이 수선실 다닐 때 슬쩍슬쩍 흘리는 수법을 썼다. 김사장이 남편을 설득시키는 데는 특별한 수단이 동원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비밀리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일 송금하는 위탁 판매이다 보니 매출 감동은 현실적이고, 불어나는 통장은 두 남자를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외곽지에 땅을 사 두라는 것이다. 그럴싸한 이유다. 옷 팔아서 언제 큰돈 만지겠느냐, 땅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둥 자꾸 부추겼다.


우연하게 수선실에서 듣게 되었다.


"나여사님 땅 샀다면서요?"

"무슨 말씀?"


철여만 몰랐다.

장사하느라 바빴지 남편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다.

착한 남편은 친절한 부동산 김사장에게 넘어갔다. 벌써 투기 선수들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막판에 산다고 달려든 거다. 거의 빛의 속도로 진행되었고 철여가 안 시점은 이미 손 쓸 타이밍이 아니었다.


흐름을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남편은 급했다. 당장 돈이 안 될 땅을 샀다. 사기 아닌 사기였다. 그 땅도, 남편도, 부동산에게 사기당한 셈이다. 곧 해제된다는 그린벨트가 투기과열로 다시 묶였다. 너무 친절한 사기는 철여의 사기도 꺾었다.

한발 늦은 통장관리부터 묶었다.

다시 시작이다. 밤늦도록 바지밑단 수선을 해야 한다. 가위질 한번 잘 못 하면 고객도 바지도 버려야 한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미워하거나 원망할 시간에 넥타이 하나라도 더 팔 궁리만 한다.

그래야만 했다.

부동산은 탐욕이다. 기회인지 유혹인지 잘 구별해야 한다.

경기에도 흐름이 있고 패션에도 흐름이 있다. 옷장사의 눈에는 고객의 흐름만 보여야 한다. 름을 알면 두 번 실패하지 않는다.



Level up~!
이 글은 허구가 아닌 사실과 실제 경험에 바탕하지만 순서대로 나열하기보다 특정한 형식이나 사건에 집중했다.
무엇을 쓸까 보다 무엇을 안 쓸까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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