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파티
우리 나이로 내년에 고3이 되는 나의 첫째아이(아들)는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났다.
직장일로 결혼과 동시에 일본 나고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된 나와 와이프는 허니문 베이비인 이 녀석 때문에 신혼생활은 얼마 즐기지도 못하였지만, 처갓집에서도 첫째아이라는 기쁨과 축복 덕택에 어려서부터 가족들에게 비교적 많은 사랑을 받았다.
3.9kg 의 우량아로 태어나 잘 먹고 잘 자고, 항상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이라 어디가 아파도 제대로 티한번 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아빠를 잘 따라, 내가 어디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때를 쓰며 매달리다가,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매일매일 아빠를 찾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이 아이 때문에 우리 부부 모두가 매우 속상했던 적이 한 번 있었는데, 8살이 되던 해 인가 어느날 갑자기 아이의 왼쪽 눈이 빨갛게 충혈된 후 잘 낫지 않는다며 와이프가 걱정을 하며 이야기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과에 데려가 검사를 받아보자 했고, 진찰후 의사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원인은 알수 없으나, 아이의 왼쪽 눈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거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원인을 알수 없다…
나와 와이프는 순간 칠흑같은 공포와 절망감에 빠졌다. 우리는 곧 이곳저곳 유명하다는 안과 전문의를 찾아다녔고 결국에는 서울의 모 병원에 계신 아태지역 최고 권위의 안과 교수님께 진료를 받게됐다.
교수님 말씀이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보는데, 선천적으로 수정체가 기울어져 점차 박리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두면 왼쪽 눈은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하면 수술은 비교적 간단히 끝날 수 있지만, 이렇게 된 원인이 유전병 때문인지 아니면 후천적 원인인지 아직 알수 없기 때문에 수술후 몇 가지 유전병 검사와 함께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지만 우리는 수술을 선택하고 묵묵히 경과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아본 결과로는 유전병 일 경우 양쪽 눈 다 시력을 잃을수 있고, 또 신부전증 같은 질병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사할 수도 있다고 했다.
수술후 우리 부부에겐 6개월 간의 지옥같은 시간이 흘렀다. 와이프는 만약 유전병으로 판명될 경우, 자기 안구를 아이에게 주겠다고 했다. 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던 그 날,
난 무슨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다짐을 했었고 와이프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드디어 의사를 만나 상담을 했다. 의사 말이 “천만다행이도 유전병은 아닙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르지만 수술경과도 좋고 나머지 오른쪽 안구도 매우 건강해 보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앞으로 3 년간 매년 한 번씩 들러서 검진만 받으시면 됩니다…“
나는 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와이프는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진료실에서 나오자 마자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 후 아이는 다행이도 건강상 별탈없이 잘 자라주었다. 재작년까진 중국에서, 작년부턴 이 곳 자카르타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고 산업디자인 전공을 목표로 대학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전 학교에서 아들의 첫 전시회가 있어관람을 간 적이 있다. 다른 고학년 학생들과 함께 그간 작업했던 작품들 중 몇몇을 전시했는데, 작품들을 보니 대부분 어린 아이가 수술대에서 수술을 받는 장면, 반은 희뿌연 시각과 반은 맑은 시각으로 동시에 사물을 바라보는 장면, 아이가 눈에 좋은 음식들을 잔뜩 쌓아놓고 억지로 먹고 있는 장면 등 어릴적 받은 수술과 왼쪽 눈시력 개선을 위한 오랜 가림치료로 표현은 안했지만 자기나름 마음 속 트라우마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그런 아들이 어제 생전 처음으로 학교에서 주최한 Prom (댄스파티)에 참가했다. 아빠 양복과 구두를 빌려 입고, 향수를 뿌리고, 헤어왁스에 스프레이까지 잔뜩 멋을 부리고 나갔다. Prom이 끝난 2차에서는 난생처음 맥주도 조금 마신다고 했다. 엄마에게 밤늦게 보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니, 다들 큼직한 아빠 양복을 빌려입고 어색하게 넥타이를 맨 모습들이 우스꽝스럽기도하고 귀엽기도 하여 웃음이 났다.
아, 우리아들도 이제 다 컸구나!
다음은 아들이 쓴 전시작품 프롤로그(Prolog) 중 일부이다.
“**** 디자인 수업은 내가 백내장이라는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내 세상은 언제나 흐릿하고, 왜곡되어 있으며, 불확실했습니다 — 이것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자라면서 나는 종종 외로움을 느꼈고,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명확함과 평범함을 갈망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슬픔이 나를 집어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기쁨과 따뜻함, 그리고 감사함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런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들을 느끼는지를요. 나는 겹겹이 쌓인 질감, 부드러운 초점, 조각난 이미지들을 통해 나의 시각을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시각적 언어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내 시력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 작업은 단지 상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 해낸 아들이 너무나도 대견하고 고맙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쯤 글을 적고 있는데, 마침 아내와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해서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들, 아빠가 글을 쓰고 있으니 내려가서 아이스크림 좀 받아올래? 너랑 엄마가 시킨거…”
곁에서 영화를 보고있던 아들이 무심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빠가 좀 가서 가져와, 나 지금 영화보고 있는데…”
저눔시키. 다 큰 놈을 때릴 수도 없고…
내가 잘 못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