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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Aug 18. 2024

기울이는 마음

태백에서

         

 물길 따라 걷는 네 명 모임 ‘물소리길’.

칠월에는 멀리 태백으로 간다. 다행히 장마전선은 남하하여 소강상태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기차는 달린다. 그동안 내린 비로 여기저기 물이 철철 넘친다. 고한을 지나 곧 태백에 도착한다. 걱정하던 날씨는 가끔 흐리지만 여행하기에 더없이 좋다.


검룡소 가는 길. 서늘하다. 맑은 물소리와 녹음이 마음을 씻어준다. 검고 깊은 소(沼)에서 솟아나 초록의 돌이끼 위로 흐르는 물은 원시적이다. 이 조그만 시원(始原)에서 발원한 물이 굽이굽이 514㎞를 흘러 1600m의 폭을 가진 한강을 이룬다. 무언가 시작되는 곳. 그 앞에 서니 숙연해진다. 물의 시작점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인생의 물길에서 목적지를 향해 잘 흘러가고 있는지. 어딘가 고여 있는 것은 아닌지. 시작점은 돌아보고 수정하게 만든다.


검룡소


  매봉산 40만 평 배추밭에는 배추밭 사이사이 노란 꽃들이 천지에 피어 있다. 배추에 벌레가 끼지 않게 한다는데 이런 식으로 해충을 쫓으면 농약을 덜 해도 되겠네. 70기가 넘는 바람개비가 여기저기 서 있다. 오늘은 바람이 많지 않아 ‘바람의 언덕’이란 말이 무색하게 고요하다. 구름이 풍력 발전기 너머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는데 그곳에 해가 비쳐 야광처럼 빛난다. 구름과 해와 흐린 구름이 번갈아 교차하는 시간이 떠 있는 하늘이 신비롭다.


7월 11일의 배추밭. 아직은 덜 자랐다.
매봉산 배추밭



 만항재로 가려고 차를 탔는데 금세 어두워지며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유리창을 두들긴다. 신기하게도 차를 타면 비가 오고 구경할 때는 해가 난다. 우리나라 가장 높은 도로인 1330미터 만항재에서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와 고생대 지질로 이뤄진 구문소로 간다. 다시 비가 쏟아진다. 흘러가는 도도한 물이 용트림하듯 빗속을 나아간다. 가로막은 산 바위를 뚫어 찻길을 만든 것이 더 눈에 띈다. 일제 강점기 때 석탄과 물자를 실어 나르려고 만든 길이란다. 입이 벌어진다.


 우리는 일찍 숙소로 온다. 창으로 골프코스도 보이고 멀리 산들이 아득하게 잠들고 있다. 다음 날, 산책길. 산속의 아침은 고요하다. 맑고. 안개 낀 산들이 겹겹이 어깨를 감싸고 있다. 첩첩산중. 운무 내린 산에 온 세상의 고요가 다 밀려와 있다.


 날이 더워져서 황부자 며느리길은 걷지 못하고 황지 연못을 돌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밀린 이야기를 한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가 석탄박물관으로 간다. 폐업한 광업소 이름들, 무너진 갱도에 들어가는 구조대원 모형,  진폐증 진단을 받은 두툼한 진단서 묶음, 같은 가슴아픈 사연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진폐증 진단서 뭉치

 


자유시장 안, 부산옹심이에서 감자전과 옹심이를 먹으며 무거운 마음을 내려보내 본다. 여행을 마치고 터미널로 걸어오는데 길거리 텃밭에 싱싱한 고추가 조롱조롱. 정 많은 이곳 사람들 마음 같다. 서로 태백에 와서 한달살이 할 거라고 농담을 한다.


 역사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폭우가 내린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를 뚫고 사람들이 철길을 건너 승강장으로 건너간다.  


 “저것 봐, 우산 씌워주고 있네.”

 

 영이언니가 하는 말에 돌아보니 두 젊은이가 우산을 쓰고 왔다 갔다 한다. 제복을 입은 걸 보니 역무원이다. 한 사람씩 우산을 씌워 사람들을 건넨다. 때마침 하행선 기차가 들어오자 내리는 사람도 건네준다. 아기를 안고 우산을 들을 수 없는 젊은 엄마도 씌워 건넨다. 옆 사람에게 우산을 기울이느라 역무원의 등과 다리는 이미 흠뻑 다 젖었다.


손님들을 다 건네고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간다.

“매번 이렇게 하시나요? 감동했네요.”

순박한 젊은이는 쑥스러운 얼굴로 “우산이 없으시잖아요,” 한다. 배시시 웃는 젊은이가 그렇게 늠름하고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7월에 새겨진 아름다운 장면 하나. 철길을 건네주는 따듯한 마음. 누군가에게 기울이는 마음은 아름답다. 장대비 쏟아지는 뿌연 하늘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짧은 나들이 동안 우리 넷도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준 시간이었다. 늦은 밤, 좋아하는 테니스 경기인데도 티비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그림으로만 본 영이언니, 감기 끝무렵이 폐가 될까 봐 더운데도 마스크를 끝내 벗지 않은 나미 언니, 동생까지 동원해서 맛집과 숙소를 미리 섭외하고 그림자처럼 일행을 살피는 수니, 천천히 보폭을 맞춰주고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면서 순간순간 서로에게 기울인 마음들이 있어 행복하고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되었다.


맑은 물 흐르던 태백.

온통 훈훈해진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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