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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Nov 27. 2023

할머니를 쏙 빼닮은 이름 모를 꽃

서울의 대학원 후배들 틈에 껴 어시스터로 참여한 논문이 마무리가 됐다. 그리고 <가제: 다시 오지 않을 너에게>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던 소설도 장막 뒤에서 거의 마무리가 되어간다.


과정 중에 쌓였던 노곤함과 피로는 이렇게 모두 끝난 뒤 성취감으로 보답을 받는 기분이다. 이 후 평가는 타인의 몫이지만,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모두 떠난 텅빈 무대 위에 서있는 듯한 뿌듯한 기분은 오롯이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올해 초 목표로 했던 계획들, 미국에서의 경비행기 조종사 면허 취득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에서 돌이켜보니 나머지는 그런대로 이루어 낸 것 같기도 하다.


해서 오늘은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을 해치웠다. 내시경 검사도 받고, 수개월째 미뤄왔던 치과도 다녀왔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의사 선생님께서 결과를 보시더니 피익 웃으신다. “너는 어떻게 술을 그렇게 마시는데 이상이 하나도 없냐” 하시며. 이 또한 뿌듯하다.


뒤이어 할머니가 김장 할 배추를 이웃집에서 얻어놨다며 가지고 가라고 연락이 와서 할머니 시골로 향했다. 요즘 할머니가 귀도 점차 안들리시고, 안색이 많이 안좋은거 같아 무얼 해주면 좋을까, 한참 고민을 해봤다.


그러다 이름 모를 꽃이 생각이 났다. 대나무에 꽃이 핀 형상인데, 이게 대나무 꽃인지, 금전수인지, 나도 확실히는 알길이 없었다. 무튼, 할머니한테 대충 얼버무릴 생각으로 그 꽃을 구해서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또 만나는 색시 없냐며 보자마자 새장가 타령을 시작했지만, 나는 먼 산을 바라본 채 슬그머니 ‘대나무 꽃(?)’을 꺼냈다. “할매, 요게 대나무 꽃인데, 꽃이 70년에 한 번 핀데. 그리고 꽃이 피면 동네에 행운이 찾아온다네. 하하” 말해놓고도 민망했다.


할머니도 천상 여자인가 보다. 손자에게 꽃을 받으니 소녀처럼 기뻐하신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평일이라 멀리 살고있는 삼촌이랑 고모는 못온다고 하니, 엄마랑 단둘이 또 제삿상을 차려놓고 오늘 밤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갑자기 궁금해서 할머니한테 여쭤봤다. 할아버지는 몇년생이셨는지. 1923년생이라고 한다. 응?? 그럼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하고 친구뻘이셨네?? 근현대사의 한 가운데에 우리 할아버지가 있었다니, 놀랍다. 우리 아버지는 1959년생, 나는 1982년생. 그러고보니 우리 아빠가 날 엄청 일찍 낳으셨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어쨌거나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 모두 이 세상엔 이제 안계신다. 두분 다 환갑도 못채우고 돌아가셨으니, 이승에 아쉬움이 얼마나 클까도 싶다. 손자 노릇, 아들 노릇 못한 나의 원죄는 이렇게라도 살아가며 받고 있으니 훗날 하늘 나라에서 만나뵈면 그 죄를 사해주시리라 믿고 싶다. 오늘은 할아버지 기일이니 하늘 나라에서 두분이 목좋은 잔듸밭에 앉아서 그 좋아하시던 삼겹살 지긋이 구워드시길 바란다.


얘기를 하다보니 할머니가 또 눈물을 보일거 같아 빨리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차에 다 싣지도 못할 정도로 배추를 참 많이도 구해놓으셨다. 겨우내 우리 많이 먹으라고,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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