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눈 기억

by 임기헌

날씨가 좋아 엄마가 쉬는 날이면 함께 바람을 쐬러 종종 나서게 된다. 누나네가 있는 포항에 들리기도 하고, 주로 엄마가 가보지 못한 도시나 한적한 시골에 들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면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자연스레 엄마랑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다. 엄마가 좋아했을법 한 봄내음 가득한 7080음악과 차창 밖으로 흩날리는 꽃잎들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준다.


얼마전에 엄마가 통장을 건네며 그런다. 몇년 동안 모았다며, 가지고 있다가 쓰란다. 금액도 꽤나 크다. "응? 나 투자해놓은거도 있고 여윳돈도 꽤 있는데? 아니 그리고 나는 지금 한창 일하고 있는데, 그냥 나뒀다가 엄마 쓰쇼. 왜 이래 이거"


능청스럽게 응수하며 통장은 받아뒀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별뜻은 없고, 하도 가난하게 살아와 해준게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마치고 툭하면 몰래 오락실에 가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제 시간에 오지 않으면 빗자루를 들고 오락실로 찾아와 뚜드러 패면서 집으로 데리고 가곤 했었다.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한다. 그때는 오락 한 판이 5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왜 그때 오락 한번 실컷 시켜주지 않았는지, 후회가 든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용돈이 100원이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50원짜리 떡볶이나 오뎅 하나를 사먹고, 50원으로 오락 한 판을 하는게 큰 재미였다. 당시 보글보글, 슈퍼마리오, 스트리트파이터, 스노우볼, 팡팡, 갤러그, 등등 고전 게임들이 한참 유행이었다. 오락도 젬병이었던 나는 50원을 금세 날리고, 친구들이 게임하는 모습만 봐도 참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크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공부를 해야 사람이 된다'라는 당시 시대의 자화상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그 오락실이 참 싫었나보다.


고속도로 위를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엄마가 작년부터인가, 재혼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니 내가 궁금해졌다. 엄마는 요즘 왜 나한테 다시 결혼하라는 소리 안하냐고. 엄마는 말한다. 하면야 물론 좋겠지만, 내가 작년 말즈음 마지막으로 만난 여자를 끝으로 여자를 워낙 혐오하고 싫어하니까 즐겁게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뭐,,, 이야기가 싱겁네,,ㅎㅎ 안한다는 게 아니고, 나중에 내가 좀더 멀쩡한 사람이 되고 그때도 누가 나랑 살아준다는 여자가 있으면 좋은거고, 아니면 엄마랑 둘이 세계여행이나 다니면 되지뭐"


그리고나서 나는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내가 만약 지금도 서울에서 살고, 서울에서 가정을 꾸렸다면 엄마는 장례식에서나 볼 껄? 요즘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랑 잠시라도 있으려고 하나뭐. 그런 걸 바래서도 안되고. 여행을 가도 엄마는 놔두고 갈테고, 명절 때도 우리끼리만 어딘가에 갈테고, 어른들한테는 안오려고 핑계만 늘어나겠지뭐. 그러다 늙고 병들면 병원에서 잠깐 보다가 끝나겠지. 지금도 다들 그렇게 살잖아. 지들 삶이랑 자식이 우선이지 부모를 챙길수가 있나뭐. 그러니 엄마는 행운이라고 생각하셈.ㅋㅋ"


서로 피식 웃고만다. 엄마는 그제야 왜 그렇게 여자가 싫어졌는지 궁금하단다. 나는 서슴없이 답한다. "가증스럽고, 겉과 속이 다르고, 명품에 환장했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 내가 그들에게 대놓고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어서 입다물고 있는거지, 다 아는 거 잖아. 집을 해가도 불만이고, 연봉이 1억이여도 불만이고, 또 어질어질 한데 이거..ㅎㅎ"


그래도 괜찮은 여자 있을텐데, 너도 참...


어느새 속리산 자락의 휴게소에 들렸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침묵 속에 많은 생각이 든다.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다고 고백하는 어느 시인의 마음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내 마음을 멎게 한다.


엄마와 함께 할 시간들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든다. 엄마의 사랑으로 가득했던 내 삶의 종착역은 어디즈음일까. 천국과 지상 사이의 어딘가에서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고 떼쓰며 울고있진 않을까. 빗자루로 후들겨 맞으면서도 게임을 더하고 싶어 오락실에 버티며 울었던 그날처럼.


"우리 엄마 오늘 아침에 죽었잖아. 근데 어떡해, 벌써 보고 싶어"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에서 어린 애순이가 엄마 장례를 치르는 중 서럽게 울며 한 말이다. 어린 관식이는 함께 울며 밥을 떠먹여준다.


그래, 그 옛날 제주에서 들려오는 순백한 그들의 울음을 퍼 담아야겠다. 다가올 그날, 한철 요긴하게 울음을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 엄마, 내가 쥐어준 용돈까지 한 푼도 안쓰고 고스란히 모으고 있는 우리 엄마, 아빠가 떠난 컴컴한 방에서 여전히 아빠를 그리는 우리 엄마, 나는 나중에 어떡해- 엄마가 없으면 너무 보고 싶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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