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그리움

by 임기헌

2002년 10월. 6주간 신병훈련을 받고, 5사단 중부전선 최전방 철책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6.25전쟁 때 격전지 중 한곳이었던 ’백마고지‘ 능선이 자리잡은 곳이다. ”신병 받아라!!“ 하며 군고참들의 관습대로 나는 새벽 무렵 내무반에 들어섰고, 어이가 없었던 고참들은 곧바로 갈굼과 얼차려를 시전 했으며, 나의 군생활은 그렇게 시작이 됐다.


그 시절 신병은 내 기억으론 최고참 바로 옆에서 잠을 자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기억나는 한 가지. 눈이 소복히 내린 어느 새벽 철책 근무를 마치고 최고참 옆에서 잠이 드는데, 그 고참이 나즈막이 물었다. ”기헌이 넌 사회에 있을 때 가수 누구 좋아했어?“


”이병! 임!기!헌! 저는 김민종과 쿨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모두가 잠든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눈치없이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고참은 놀란듯 흐뭇한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이어서 말을 건넸다. ”이번에 쿨 새앨범 나왔는데, 너 못들어봤겠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그는 침낭 밑에 숨겨뒀던 카세트(mymy)를 꺼내더니 싸구려 테이프 하나를 장착한 뒤 이어폰 한 쪽을 내 귀에 꽂아주는 거였다. 쿨의 새앨범 타이틀곡 <백설공주를 사랑한 일곱번째 난쟁이>라는 곡이었다. 잔잔한 나래이션과 함께 노래는 시작이 됐고, 당시 전화기며 TV며 아무것도 없어서 그리움에 몸서리를 쳤던 나는, 철책의 작은 내무반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꿈속에서는 마음껏 사랑을 해도 혼나지 않을것만 같았던, 그런 순간. 밖에는 하얀 눈이 소복히 내려 앉았고, 그날따라 북한군의 대남방송도 침묵했더랬지.


2020년. 이혼 후 한참이 지났고, 가족들을 볼 낯이 없었던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될지 몰라 혼자 제주도를 찾았다. 애월 앞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작고 허름한 민박집을 구해 계획도 없이 두달 간 계약을 맺었다. 그리움에 가까운 애월리라면 동그란 내 삶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오전7시부터 밤9시까지 종일 제주도를 걸으며 글을 썼다. 해가 진 9시 무렵 숙소에 복귀할 즈음이면 애월리 밤바다를 수놓은 오징어 배들이 보이는데, 규현의 <애월리>라는 곡을 하루도 빠짐없이 들으며 그날의 하루를 마감했다.


’여울지던 파도 소리 가득한 까만 애월리/ 밤바다의 수놓인 배들의 불빛이/ 나의 외로움을 달래려 하는 걸‘


나는 이 가사가 참 좋았다. 동시에 밤바다와 밤하늘 사이의 수평선을 보며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도 많았다. 지나치게 감성적이었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유난스럽거나, 자의식 과잉이었거나.


그날들이 아득히 먼곳처럼 느껴지는 오늘이다. 그 노래들이 들렸던 그곳이, 두 개의 그리움이, 왜일까.


매년 다가오는 12월과 1월, 이 두 달 상간 만큼은 사랑을 하고 싶다. 나이 차이를 비롯해 그 어떤 속물같은 계산 따위는 없이. 그리고 눈이 그치고 기온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면 헤어지는 거다. 이 얼마나 유치하면서도 쿨하지 아니한 관계인가. 어색하거나 아무 말도 생각이 안나면 꽉 안아버리면 되는 걸. 어색한 웃음도 그 장면에서는 무척이나 어울리겠지.


노래가 되어 기억을 거슬러 가 본 오늘, 나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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